민간기업에 전기 소매시장 개방해 소비자 선택권 넓혀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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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여름 전기요금 논란의 뿌리는 기형적인 한국의 전력산업 구조에 있다. 한국전력은 6개 발전 자회사 등이 만든 전기를 사서 독점으로 되판다. 가격을 결정하는 기본원리인 수요와 공급에 따른 ‘가격 신호’가 작동하지 않는다. 대신 물가, 산업 육성, 저소득층 지원 같은 정부의 입김이 가격을 좌지우지한다. 원료비가 크게 떨어지거나 올라도 전기요금은 꿈쩍하지 않는다. 생활환경의 변화에 맞춰 다양한 요금제를 바라는 소비자의 목소리가 높아져도 반응이 없었던 건 그래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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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이 말하는 대안
경쟁 체제 도입 때 부작용 막게
소외계층 의무 공급제 검토를

전문가들은 견제와 감시, 경쟁의 원리를 도입하는 게 근본 처방이라고 진단한다. 이수일 한국개발연구원(KDI) 경쟁정책연구부장은 “전 세계에 유례가 없는 누진제가 장기간 유지된 건 독점 구조 때문에 가능했다”며 “스마트그리드 등의 발전으로 다양한 전기 서비스가 창출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는 만큼 새로운 시장 참여자가 들어올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도 한전의 독점 체제에서 시장 개방으로 전환을 시도했다. 1999년 정부는 ‘전력산업구조개편 기본계획’을 마련하고 2009년 1월까지 전력산업에 대해 완전경쟁을 도입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런 정부의 작업은 금세 무산됐다. ‘민영화’ 논란이라는 장벽에 막혀서다. ‘전력산업 개편=한전 민영화’로 여긴 발전노조 및 일부 시민단체와 정치권의 반발을 이기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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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전기요금 폭탄’ 논란에 정부와 새누리당이 부랴부랴 구성한 ‘전기요금 당정 태스크포스(TF)’에서도 누진제 완화와 같은 ‘땜질 처방’ 이외에 전력산업 구조 개편에 대한 논의는 이뤄지기 어려울 전망이다. 당장 야당이 반발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전기요금TF 간사인 홍익표 의원은 “전기요금 대란의 원인이 ‘공기업 독점체제’ 때문이라는 지적이 있다. 민영화 논리로 활용하고 싶은 측면이 정부·여당 일부에서 나타난다”며 “이건 잘못된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전력산업의 구조적 개편을 미뤄서는 안 된다는 지적이 강하다. 전력시장 개방은 한전을 다른 기업에 매각하는 것이 아니라 한전이 독점하는 전력 생산과 판매 시장에 다른 사업자들도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요지다. 한전의 민영화가 전력시장 개방의 필요 조건은 아니라는 얘기다. 이종영 중앙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는 “한전과 민간 사업자가 각각 전기를 판매하는 경쟁 구조를 만들어 소비자들의 선택권을 넓히면 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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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 기업이 전력 소매판매 시장에 들어올 유인을 마련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정부는 민영화 논란을 피하기 위한 ‘우회로’로 전력산업 중 소매판매 시장 개방을 추진하고 있다. 조성봉 숭실대 경제학과 교수는 “한전이 송배전망을 독점하고 있는 만큼 송배전망 이용에 따른 비용이 기업의 판매시장 진입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며 “기업이 한전의 송배전망을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의 전력 시장 개편 작업을 견제·감시할 수 있도록 전기위원회의 역할을 제고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전기위원회는 전기사업의 허가, 요금 조정 및 체계, 전력시장 및 전력계통 운영 감시 등을 하는 기관이지만 정부와 한전의 입김이 세 사실상 거수기 역할에 그친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고 있다. 윤원철 한양대 경제금융학부 교수는 “전기위원회가 산업통상자원부 산하에 있다 보니 정책을 만드는 기관이 규제도 동시에 하는 불합리한 체제가 됐다”며 “미국의 독립 에너지 규제기관인 연방에너지규제위원회(FERC)와 같이 실질적인 독립성을 담보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경쟁 체제 도입 과정에서 농어촌 주민들의 전기요금 부담 가중 같은 부작용을 완화해야 한다. 유승훈 서울과학기술대 에너지정책학과 교수는 “전력시장 개방이 필요하긴 하지만 소매판매자가 안정적 수요가 있는 산업용을 선호하고 농어촌 주택용은 외면할 가능성도 있다”며 신규 사업자에게 소외계층에 대한 의무 공급 규정을 두는 방안 등을 검토해 부작용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남현 기자 ha.namh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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