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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의 바로 보는 북한] 노무현 “북핵 일리있는 측면있다”…MB는 6자회담만 믿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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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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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배지를 단 북한 여성들이 12일 평북 신의주와 국경을 마주한 중국 단둥 세관에서 줄지어 통관을 기다리고 있다. 중국 지역에서 일하는 북한 여성 근로자로 추정된다. 유엔과 국제사회는 북한의 5차 핵실험에 대응한 대북제재 차원에서 해외 북한 근로자 송출을 금지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단둥=로이터]

북한의 핵 개발에 대한 미국과 국제사회의 우려가 한껏 고조된 2004년 11월. 방미(訪美)에 나선 노무현 당시 대통령은 LA연설에서 “북한은 핵과 미사일을 외부의 위협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한 억제수단이라고 주장하고 있다”고 운을 뗀뒤 “북한의 주장에 일리 있는 측면이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처음엔 “북한의 주장이 합리적”이라고 했다가 ‘일리있다’는 취지로 바꿨다. 노 대통령의 발언은 큰 파장을 던졌다. 북한의 핵 개발 논리에 정당성을 부여한 것처럼 해석될 여지를 남겼다는 점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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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1년11개월 뒤 북한이 첫 핵 실험(2006년 10월 함북 풍계리)을 했지만 노 대통령의 북핵 인식은 여전히 논란거리였다. 핵 실험 한 달 뒤 연설에서 그는 북한이 핵 무기로 선제공격할 가능성에 회의적 입장을 보였다. 10년이 흐른 지금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은 잇단 핵 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시험발사를 거치며 “핵 선제타격 능력을 갖췄다”고 공언하고 있다.

역대 정부 북핵 대응 어떻게
YS, NPT 탈퇴에도 정상회담 추진
DJ, 김정일 북핵 동결 제스처 과신
“남북관계 성과내기 집착해 패착”

북한이 지난 9일 역대 최대 위력의 5차 핵실험을 감행하자 정부는 대응책 마련에 부산하다. 하지만 북핵 개발 과정을 되짚어보면 역대 정부의 일관성없는 대응과 대통령의 리더십 부재가 드러난다. 정영태 동양대 군사연구소장은 “북핵 위기를 안이하게 여기고, 북한 감싸기나 남북관계 성과내기에만 집착한 게 패착”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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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핵개발 의혹이 윤곽을 드러낸 1993년 2월 말 김영삼 당시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김일성 주석을 직접 호명하며 정상회담을 제안했다. 그러면서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나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3주도 지나지 않아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하는 등 1차 북핵위기가 터지자 “핵을 가진자와 악수할 수 없다”며 태도를 완전히 바꿨다. 그런데 이듬해 7월엔 김일성과 정상회담에 합의했다. 같은 달 김일성 사망으로 회담은 무산됐고, 10월 북한과 미국이 핵 동결과 대북 경수로 발전소 및 중유(重油) 지원을 맞바꾸는 제네바 기본합의를 내놓자 입장이 어정쩡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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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적 대북접근을 시도한 김대중 대통령은 북핵 의혹에 대해 좀체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취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북핵 동결’ 제스처를 과신했고, 북한의 합의이행을 믿었다. 2000년 6월 첫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켰지만 이후 남북대화 과정에서 북한 핵은 늘 발목을 잡았다. 김대중 정부 말기인 2002년 11월엔 정세현 당시 통일부 장관이 미국의 대북중유 중단 방침에 반발하자 외교부 대변인이 나서 “정 장관 발언은 정부 공식입장이 아니다”며 반박 성명을 내는 볼썽사나운 모습도 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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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핵에 대한 미덥지 못한 대응은 보수정부도 예외가 아니었다. ‘비핵·개방 3000’(핵 포기시 북한 주민의 연소득이 3000달러가 되도록 지원하겠다는 정책)을 내세운 이명박 대통령은 북한의 핵 폐기 창구로서 6자회담을 대안으로 강조했다. 하지만 북한의 3차 핵실험이 터진 직후엔 “협상이나 대화로 핵을 포기시킬 수 없다”며 북한 체제가 붕괴해야 핵 문제가 해결될 것이란 입장을 보였다. 퇴임을 열흘 앞둔 시점이었다. 북핵 위협의 현실화를 목도한 박근혜 대통령은 “김정은의 정신상태는 통제불능”이라며 초강경 대응을 천명했다. 이어 군 당국은 “도발시 평양을 지도에서 사라지게 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하지만 북핵 해결을 위한 알맹이 있는 전략이나 해법은 찾아보기 어렵다.

전문가들은 핵 개발에 필요한 3대 요소로 기술과 자본(돈), 그리고 최고지도자의 의지를 꼽는다. 익명을 요구한 국책연구기관 박사는 “핵을 대응하는 데에도 대통령의 의지와 통치철학이 절대적 요인이란 의미”라고 말했다. 북한이 김일성과 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3대세습을 통해 집요하게 핵무기 보유에 매달리는 동안 우리의 대응은 물러터졌다는 얘기다. 이제라도 북한의 핵을 저지할 수 있는 결연한 의지와 대북전략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8일 라오스 동아시아정상회의(EAS)에서 “지금 북한의 의지를 꺾지 못한다면 국제사회 전체가 후회하는 날이 오게 될 것”이라고 말한 대목에도 이런 절박성이 담겨있다.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yj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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