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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자의 성녀' 테레사 수녀, 성인이 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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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년 한국을 방문한 마더 테레사 수녀가 서강대에서 강연을 하고 있다. 테레사 수녀는 4일 성인품에 오른다. [중앙포토]

1997년 선종한 테레사 수녀는 오랫동안 성녀로 불렸다. 가난한 자들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자를 위한 ‘빈자의 성녀’였다. 그는 4일 공식적으로도 성녀가 됐다. 선종 19년 만이다. 수 세기가 걸린 경우가 다반사란 걸 감안하면 이례적 초스피드로 성인 반열에 오른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4일 오전 바티칸 성베드로 광장에서 테레사 수녀의 시성식과 시성 미사를 집전했다. 광장은 신도들로 발을 디딜 틈 없이 빼곡했다. 수십 만 명이 운집했다. 곳곳엔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모습의 수녀 초상화가 보였다.

교황은 이날 “테레사 수녀는 자비 그 자체”라고 말했다. 수녀의 삶이 가톨릭이 지향하는 자비의 사표라고 여긴 것이다. 교황으로선 이날 행사가 지난해 말 선포해 올 11월20일 막을 내리는 ‘자비의 희년(禧年)’의 하이라이트이기도 하다.

테레사 수녀의 시성은 두 가지 기적이 있었다고 인정됐기 때문이다. 테레사 수녀에게 기도해서 위종양을 치유 받았다고 증언한 인도 여성의 2002년 사례와 뇌질환에 걸렸다가 회복한 브라질 남성의 지난해 사례다.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엔지니어로 일하는 그는 시성식을 앞두고 바티칸 기자들과 만나 “2008년 뇌질환으로 병원에서 생존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했지만 수술 직전에 두통 등의 증상이 깨끗이 사라졌고 수술 없이 몇 달 후 일상에 복귀했다”고 말했다.

테레사 수녀의 명성도 시성에 기여했다. 그는 20세기 가톨릭을 대표하는 얼굴이다. 1975년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의 표지 인물이 됐다. ‘살아있는 성인’의 한 명으로 불렸다. 1979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테레사 수녀는 당시 “난 자격이 없다”고 말했다.

테레사 수녀는 카리스마 넘치며 못지않게 높은 대중적 인기를 누린 요한 바오로 2세와 가까웠다. 바오로 2세는 테레사 수녀가 선종한 지 2년 만에 시복 절차를 시작했다. 원래 5년이다. 2003년 테레사 수녀를 복자로 추대했다. 바오로 2세도 2014년 성인이 됐다.

테레사 수녀는 현재는 마케도니아의 수도이지만 당시엔 오스만제국에 속했던 스코페에서 알바니아계 부모 사이에 태어났다. 10대 초반부터 가톨릭에 헌신하기로 결심한 그는 1928년 아일랜드로 건너가 수녀가 됐고 이듬해 인도로 건너갔다. 그 이후 가족을 만나지 않았다.

인도에선 20년 간 수녀원이 운영하는 학교의 교사를 지냈다. 나중엔 교장까지 됐다. 주변의 가난을 목격하곤 50년 12명의 수녀와 함께 ‘사랑의 선교회’를 세웠다. 극빈자·고아, 나병·후천성면역결핍증(AIDS) 등 죽음을 앞둔 사람을 위해 헌신하기 시작했다.

비판적 시각이 없는 건 아니다. 테레사 수녀가 가난한 이들의 삶을 근본적으로 향상시키는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게 대표적이다. 논객인 크리스토퍼 히친스는 『지옥의 천사』란 저서에서 테레사 수녀를 “현상 유지의 우군”이라고 평했다. 독재자들이 건넨 기금을 받았다는 지적도 있다. 또 그가 힌두교를 믿는 인도인들을 가톨릭으로 개종하려 한 ‘종교적 제국주의자’라는 지적도 나온다.

하지만 그의 사후에도 그를 기억하고 따르는 이들은 여전하다. ‘사랑의 선교회’는 현재 139개국에서 5800명이 일하는 단체로 컸다. 그와 같이 일한 메리 스레마 피어릭 수녀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테레사 수녀는 우리와 늘 함께 했다. 모든 수녀들과 함께하지 않는 건 어느 것 하나도 바라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았다”고 기억했다. 수녀로서 서원(誓願)을 지켰다는 의미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날 시성 미사를 마친 후 노숙인 1500명을 초대해 피자 점심을 대접했다. 대부분 테레사 수녀가 운영하는 노숙자 쉼터에 기거하는 이들이다. 이를 위해 가마 세 개가 긴급 공수됐다고 한다.

런던=고정애 특파원 ockh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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