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글로벌 아이

시각장애인 위협하는 ‘난간 없는 다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6면

이정헌
이정헌 기자 중앙일보 도쿄특파원
기사 이미지

이정헌
도쿄 특파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온통 어둠뿐이다. 날카로운 쇠붙이의 마찰음과 소음이 뒤섞여 정신을 차리기 힘들다. 말을 걸거나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없다. 옆은 낭떠러지다. 추락을 막아줄 난간은 없다. 한 발이라도 잘못 내디디면 목숨을 잃을 수 있다. 신발 밑으로 느껴지는 울퉁불퉁한 블록을 따라 곡예를 하듯 걷는다. 일본 시각장애인들은 안전 도어가 없는 전철 승강장을 ‘난간 없는 다리’라고 부른다.

지난달 15일 저녁 일본 도쿄 아오야마 잇초메(?山一丁目)역. ‘난간 없는 다리’를 지나던 시각장애인이 또 떨어져 숨졌다. 메트로 긴자(銀座)선의 지하철 운행은 1시간30분가량 전면 중단됐다. 퇴근길 3만7000명의 발이 묶였다. 그 부근 직장에 다니던 시나다 나오토(品田直人·55)는 집으로 가는 전철을 타려다 참변을 당했다. 혼잡을 피하려고 한 듯 선로 쪽 승강장에 바짝 붙어서 걷다가 삐끗하며 추락했다. 역무원이 비상정지 버튼을 눌렀지만 2초 후 전동차가 들이닥쳤다.

시나다는 홋카이도(北海道)에 살다 지난봄 도쿄로 이주했다. 2014년 5월부터 그의 곁을 지켜온 래브라도 레트리버 견종인 안내견 ‘왓후루고’는 복잡한 출퇴근길을 익혔다. 이날도 눈이 보이지 않는 주인을 안내하며 폭이 3m에 불과한 비좁은 승강장을 나란히 걸었다. 점자유도블록 중간중간엔 커다란 기둥까지 버티고 있어 발걸음을 내딛기 어려웠다. 주인을 잃은 안내견은 어두컴컴한 선로 옆 승강장에서 잔뜩 웅크린 채 발견됐다.

승강장 추락 사고가 끊이지 않고 있다. 2009년부터 5년간 일본 전국에서 시각장애인 424명이 선로로 떨어졌다. 2011년 1월 도쿄 메지로(目白)역에서 철길로 추락한 시각장애인도 전철에 치여 숨졌다. 이를 계기로 국토교통성은 하루 이용자가 10만 명이 넘는 역에 추락 방지용 도어를 설치하도록 했다. 하지만 5년이 지난 현재 도쿄 메트로 전체 9개 노선 179개 역 중 안전 도어가 설치된 곳은 85개 역에 불과하다.

철도 회사들은 핑곗거리가 많다. 긴자선 19개 역의 도어 설치비는 총 90억 엔(약 975억원). 막대한 비용 탓에 즉시 설치가 어렵다고 변명한다. 1938년 건설된 아오야마 잇초메역의 낡은 승강장은 개당 400~500㎏의 도어 무게를 지탱하지 못해 보강공사까지 해야 한다고 볼멘소리다. 철도 회사와 전동차별로 출입문의 위치가 제각각 다른 것도 안전 도어 설치의 주요 걸림돌로 꼽는다.

일본인은 집단 속에서 튀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문제가 있어도 때로는 체념하듯 받아들인다. 기다릴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린다. 그런데 이번엔 다르다. 장애인 단체들은 신속한 대책 마련을 철도 회사와 일본 정부에 촉구했다. 더 이상 돈 문제 등을 이유로 장애인의 교통권과 생명권을 외면해선 안 된다는 절박감이다. 사사가와 요시히코(笹川吉彦·82) 도쿄도 맹인복지협회 회장은 시민들에게도 호소했다. “장애인에게 ‘괜찮습니까’라며 말 한마디 건네주세요. 사고를 막을 수 있습니다.”

이정헌 도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