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글로벌 아이

유언비어의 미국 선거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4면

채병건 기자 중앙일보 콘텐트제작Chief에디터
기사 이미지

채병건
워싱턴 특파원

요즘 미국 대선이 힐러리 클린턴의 건강이상설로 시끄럽다. 물론 도널드 트럼프 진영이 대대적으로 제기했다. 트럼프 본인이 클린턴은 이슬람국가(IS)를 대적할 만한 정력이 없다며 우회적으로 건강 문제를 언급한 이후 한 측근은 클린턴이 실어증 증상을 보인다고 주장했다. 보수 인터넷 블로거들은 클린턴이 발작 증상, 초기 치매를 보인다며 동영상과 진료 기록을 온라인에 올린다. 다 가짜다. 주류 언론들은 트럼프 측의 건강이상설 제기를 놓고 ‘음모론’으로 일축하는데 한국식으로 하면 유언비어 또는 흑색선전이 된다.

민주주의 모범국을 자처하는 미국이지만 희한하게도 유언비어가 많다. 인터넷의 어두운 구석을 돌아다니는 게 아니라 하도 퍼져 주류 언론들이 통탄하며 보도할 정도의 유언비어가 잊을 만하면 등장한다. 대부분 현직 대통령인 버락 오바마와 관련 있다. 대표적인 게 지난해 여름 이른바 ‘텍사스 계엄령’이다. 오바마 대통령이 보수의 본산인 텍사스주에 특수부대를 풀어 계엄령을 선포한 뒤 대선을 취소하려 한다는 정권 연장 음모론이었다. 워싱턴포스트가 불안해하는 주민들을 현지 취재한 기사를 내보냈다. 에볼라 바이러스 때문에 뒤숭숭했던 2014년 가을엔 에볼라 괴담이 만연했다. 오바마 대통령이 과거 미국의 흑인노예제도를 속죄하기 위해 아프리카에 미군 지원 병력을 보내기로 했다는 식이다.

가장 집요했던 유언비어는 오바마 해외 출생설과 오바마 무슬림설이다. 2008년 대선 때 등장했는데 지금도 반(反)오바마 유권자들은 이를 믿으려 한다. 지난해 9월 CNN 여론조사에서 10명 중 2명꼴(20%)로 “오바마는 외국 출생”이라고 답했다. 10명 중 3명(29%)은 “오바마는 이슬람교도”라고 했다. 미국판 대선 불복이나 다름없다.

유언비어는 정보에 대한 수요는 하늘을 찌르는데 공급은 통제돼 있는 극단적인 수급 불균형 상황이 벌어질 때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곰팡이처럼 퍼진다. 하지만 선거에서의 유언비어는 위기를 맞은 쪽이 꺼내는 카드다. 앞서가면 판을 뒤집거나 이슈를 전환할 이유가 없지만 뒤지는 쪽은 국면을 바꾸기 위해 비정상적인 무리수를 감수한다. 또 트럼프 진영엔 흑색선전의 달인으로 비판받던 로저 스톤과 대선 유언비어의 확성기로 진보진영이 터부시했던 인터넷 매체 브레이트바트를 운영했던 스티브 배넌이 있다.

트럼프는 공화당 대선 후보로 확정된 지난달 말 직후 러시아의 미국 대선 개입설을 스스로 부채질하고, 엉뚱하게 무슬림 전사자 부모와 싸우며 집토끼에서 산토끼로 표심을 확장할 타이밍을 놓쳤다. 확장성의 한계가 드러나자 트럼프의 외곽 지지층은 대선 패배 가능성에 불안해하며 이탈한다. 그래서 트럼프 선거는 결국 ‘한 방 선거’가 되리라는 소문도 나온다. 정상적인 선거전으론 안 되니 약점 많은 클린턴을 향한 대형 흑색선전전이다. 이래저래 올해 미국 대선은 우리가 반면교사로 배울 게 많은 첫 전례가 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