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리우2016] 울지마 연재야, 넌 충분히 아름다웠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6면

기사 이미지

손연재가 리듬체조 4위에 오른 후 눈물을 흘리고 있다. 메달을 따지 못했지만 아시아 선수로는 올림픽 역대 최고 성적이다. [리우=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21일 리우 올림픽 아레나.

4개 종목 실수없이 완벽한 연기
0.685점 차로 메달 놓쳤지만
아시아선수 최고 4위에 올라
인터넷선 응원·격려 글 쏟아져
“6년간 원정훈련 러시아인 다 돼
이젠 한국사람처럼 살고 싶어”

리듬체조 개인종합 결선을 모두 마치고 대기석에 앉아있던 그는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17년 전 리듬체조를 시작한 순간부터 마지막 리본 연기까지 수많은 장면들이 그의 머리 속을 스쳤다.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은 눈물로 맺혔다. 딸을 지켜보던 어머니 윤현숙(48)씨도 울음을 참지 못했다. 손연재(22·연세대)의 두 번째 올림픽, 그리고 마지막 올림픽은 눈물로 끝났다.

손연재는 후프(18.216점)·볼(18.266점)·곤봉(18.300점)·리본(18.116점) 등 결선 네 종목 합계 72.898점으로 종합 4위에 올랐다. 동메달을 딴 우크라이나의 간나 리자트디노바(23·73.583점)와는 0.685점 차. “연습한 만큼만 결과가 나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던 손연재는 세계 4위라는 성적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금메달은 마르가리타 마문(21·러시아·76.483점)이 차지했다. 곤봉 연기를 하다 수구를 떨어뜨리고 울어버린 야나 쿠드럅체바(19·러시아·75.608점)는 은메달을 땄다. 신체조건이 뛰어난 동유럽 선수들 사이에서 손연재는 큰 실수 없이 전 종목 18점대를 기록했다. 혼신을 다한 그의 마지막 연기에 인터넷에는 ‘울지마 연재야!’ ‘충분히 아름다웠다’ 는 등의 응원 글이 넘쳐났다. 손연재는 “(런던 올림픽 5위 이후) 4년 동안 성장했단 걸 느낀다. 점수를 매긴다면 내게 100점을 주고 싶다”고 말했다.


▶추천 기사“의친왕의 상해 임시정부 망명 성공했더라면 대한제국 이어졌을 것”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20일 예선에서 손연재는 후프·리본에서 실수를 범해 5위(71.956점)로 결선에 올랐다. 그는 “(23명 중 10위 안에 들어야 하는) 결선에 오르지 못할까봐 긴장했다. 결선에서는 결과를 생각하지 않고 내가 연습한 걸 모두 보여주자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기사 이미지

올림픽 경기가 끝난 뒤 리우 선수촌으로 향하면서 활짝 웃는 손연재. [사진 손연재 인스타그램]

손연재는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따낸 뒤 은퇴를 계획했다. 다섯 살 때부터 해온 리듬체조가 너무 힘들었던 탓이다. 그는 “리우 올림픽에 가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운동 자체가 싫어진 적도 있었다”고 털어놨다.

흔들리는 딸을 어머니가 다잡았다. 윤씨는 “네가 연습한 걸 아직 다 보여주지 못했다. 더 노력해서 이왕이면 올림픽 무대에서 선수 생활을 마무리 하자”고 권유했다. 몸이 매트로 돌아왔지만 마음은 달라지지 않았다. 손연재는 “리우 올림픽을 준비하는 동안 그만두고 싶은 생각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들었다. 남이 하자는 대로 하는 것 같아서 싫었다”고 말했다.

그래도 손연재는 독하게 버텼다. 인터넷에선 ‘실력에 비해 과하게 스타 대접을 받는다’는 등의 악플이 넘쳐났다. 심리적으로 힘들 때가 많았지만 엄마와의 약속,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손연재는 리우 올림픽 만을 기다리고 준비했다.

지난 2011년부터 손연재는 러시아의 노보고르스크 센터에서 러시아 대표선수들과 함께 훈련했다. 유학 차 갔던 러시아 훈련기간이 계속 늘어났다. 처음엔 러시아어를 전혀 몰라 일상 생활조차 어려웠다. 매트에 선수들이 꽉 차는 바람에 한쪽 구석에서 혼자 연습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윤씨는 “러시아에서 힘들게 훈련하는 게 기특하면서도 엄마로서 마음이 아팠다”고 회상했다.

옐레나 니표도바(러시아) 전담 코치는 손연재에게 ‘저승사자’ 같았다. 동작을 완벽하게 할 때까지 조금의 여유도 주지 않고 몰아부쳤다. 손연재는 “니표도바 코치가 2010년 세계선수권대회 32위였던 나를 올림픽 4위로 키웠다”며 고마움을 전했다.

손연재의 아름다운 연기 뒤에는 땀과 눈물, 고뇌와 고통이 범벅돼 있었다. 비록 올림픽 메달을 목에 걸지 못했지만 손연재는 눈물 한 방울로 수년간 응어리졌던 감정을 풀어냈다. 경기 후 딸의 손을 꼭 잡은 윤씨는 “연재가 발목부상 때문에 고생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손연재는 “리듬체조를 통해 많은 걸 배웠다. 이런 경험들이 앞으로 내 인생에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리우에 오기를 정말 잘한 것 같다”며 환하게 웃었다.

손연재는 아직 구체적인 은퇴 계획을 잡지 않았다. 2학기에 복학하고 갈라쇼 개최만 예정돼 있다. 손연재는 “러시아에서 훈련을 하느라 지난 6년 동안 한국에서 보낸 시간이 1년도 되지 않는다. 거의 러시아인이 다 됐다. 이젠 한국사람처럼 살고 싶다”고 말했다.

리우=김지한 기자 kim.jihan@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