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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톱 랭커 빠졌지만 흥행 대박 … ‘귀족 스포츠’ 통념 깬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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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3호 25면

영국의 저스틴 로즈가 지난 15일 최종 라운드 16번 홀에서 버디 퍼트에 성공하는 장면. 1만5000여 명의 갤러리가 경기장을 찾아 로즈가 112년 만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는 장면을 봤다. [리우 로이터=뉴스1]

지난 15일(한국시간) 리우 바하 다 치주카 올림픽 골프 코스에서 끝난 리우 올림픽 남자 골프 최종 라운드. 우승자인 저스틴 로즈(36·영국)는 챔피언 퍼트를 한 뒤 상의 왼쪽 가슴에 새겨진 유니언잭(영국 국기)에 입맞춤을 했다. 메이저 대회 1승을 비롯해 미국프로골프협회(PGA)투어 7승을 거둔 베테랑이지만 로즈는 “올림픽이 내 골프 인생의 최고의 대회였다. 지금껏 우승했던 어떤 대회보다 환희가 크다”며 감격해했다.


로즈가 우승하는 장면은 미국에서만 880만명이 시청했다. 시청률 조사업체 닐슨에 따르면 리우 올림픽 남자 골프 최종 라운드 시청률은 5.6%였고, 순간 최고 시청률은 6.3%였다. 지난 4월 마스터스 최종 라운드 시청률 8.5%에 이어 올해 골프 중계 중 둘째로 높았다. AP통신의 더그 퍼거슨 기자는 “선수들의 열띤 경쟁으로 흥미진진한 승부가 이어졌다. 112년 만에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복귀한 올림픽 골프의 밝은 미래를 발견한 대회”라고 평가했다.


골프의 올림픽 복귀 노력은 2005년 싱가포르에서 열린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에서부터 시작됐다. 당시 올림픽 정식종목에서 제외된 야구·소프트볼을 대신해 골프·가라테·스쿼시·롤러스포츠·럭비 등이 2012년 런던 올림픽 정식종목 후보로 채택됐다. 그러나 골프는 총회에서 3분의 2 이상의 찬성을 얻지 못해 정식종목이 되지 못했다. 대중과 거리가 먼 ‘귀족 스포츠’라는 인식이 강해서였다.


국제골프연맹(IGF)은 올림픽 정식종목 진입이 골프의 대중화·세계화를 위한 가장 빠른 길이라고 생각했다. IGF는 전 세계 주요 골프연맹의 전폭적인 협조 아래 IOC가 중시하는 유소년 스포츠 육성, 반도핑 정책 등을 적극 도입했다. 결국 2009년 코펜하겐 IOC 총회에서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골프는 리우 올림픽을 통해 스포츠 팬들 앞으로 돌아왔다. 남자 골프는 1904년 세인트루이스 올림픽 이후 112년 만, 여자골프는 1900년 파리 올림픽 이후 116년 만이다.


그러나 ‘골프 재벌’들이 IGF의 뜻에 동참하지 않았다. 세계랭킹 1위 제이슨 데이(29·호주), 2위 더스틴 존슨(32), 3위 조던 스피스(23·이상 미국), 4위 로리 매킬로이(27·북아일랜드)가 지카 바이러스와 치안 불안을 이유로 올림픽 불참을 선언한 것이다. 매킬로이는 “난 골프 발전을 위해 골프를 하는 게 아니다”라고 했다. 골프는 여전히 ‘귀족 스포츠’에 머물고 있는 것 같았다.


IGF와 IOC의 걱정이 많았지만 남자 대회가 시작되자 갤러리들이 예상보다 많이 몰려들었다. 최종 라운드에는 IOC 추산 1만5000명 이상의 팬들이 현장을 찾았다. 일반적인 골프 대회는 갤러리들에게 정숙을 요구하지만 리우 올림픽 골프는 좀 달랐다. 자국의 국기를 상징하는 형형색색의 옷과 장신구로 한껏 멋을 낸 갤러리들이 환호를 지르고 맥주를 마시며 즐겼다. 로즈는 “이번 대회는 골프와 축제가 섞인 분위기였다. 독특하고 환상적인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미국 골프다이제스트의 에디터인 제이미 디아즈는 “처음에는 올림픽에 대한 기대가 크지 않았지만 최고의 대회로 마무리됐다. 올 시즌 가장 즐겁고 자랑스러운 골프 대회”라고 평했다.


세계 골프계는 경기 불황, 유소년 골프 인구 감소 등의 이유로 성장동력을 잃어가고 있다. IGF 피터 도슨 회장은 “올림픽을 통해 골프의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올림픽에서 골프가 자리를 잡으면 저변이 넓어지고, 유소년 육성에 탄력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여자 세계랭킹 1위 리디아 고(19·뉴질랜드)도 “나도 예전에 올림픽을 보면서 박태환 선수의 팬이 됐다. 올림픽을 통해 골프가 전 세계에 방송되면서 골프를 몰랐던 사람들도 TV 앞에 앉게 됐다. 골프에 대한 관심이 생길 것이고, 유망주들이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올림픽 잔류 가능성 커 … 단체전 도입 검토토마스 바흐 IOC 위원장은 대회 전 “톱 랭커들의 불참은 골프 종목의 올림픽 잔류에 대한 평가기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세계 최고 선수들이 불참 의사를 나타내자 강력한 경고를 날린 것이다. 하지만 날을 세웠던 바흐 위원장도 남자 경기를 흐뭇하게 지켜봤다. IGF 타이 보타우 부회장은 “모든 것이 예상보다 좋았다. 2024년 올림픽 종목 협상에도 자신감이 생겼다. 골프는 분명 (정식 종목이 될 수 있는) 표를 얻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2020년 도쿄 올림픽까지 한시적인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골프는 내년 IOC 총회 투표를 통해 2024년 올림픽 잔류 여부가 결정된다. 이때도 살아남는다면 골프는 사실상 영구 종목으로 지정될 가능성이 크다.

20일 3라운드를 마치고 한국인 갤러리들에게 사인을 해주고 있는 박인비. 리우=이지연 기자

골프 대중화를 위해 보완해야 할 점도 지적되고 있다. 4라운드 스트로크 플레이로 올림픽 금·은·동 메달의 주인공을 가리는 방식이 일반 대회 개인전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IGF 선수위원회 위원으로 올림픽 준비에 동참했던 박인비(28·KB금융그룹)는 “경기가 조금 긴 느낌이 있다. 그러나 골프가 오랜만에 올림픽에 복귀했기 때문에 위험 요소를 줄일 수밖에 없었다. 다음 올림픽 때 단체전 도입 등의 변화가 있다면 더 재미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지적에 대해 IGF 도슨 회장은 “경기 방식 변경을 검토하겠다. 의미있는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예고했다. 올림픽이 국가대항전을 바탕으로 이뤄지는 경기인 만큼 골프도 단체전과 남녀 혼성경기를 도입할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다.


태극기 물결 만든 박인비 응원단18일 여자 골프가 시작되면서 대회장에는 태극기가 물결쳤다. 30여 명 응원단 대부분은 브라질 교포들이었지만 한국에서 원정온 갤러리들도 더러 있었다. 박인비의 열혈 팬이라고 밝힌 손미옥(58)씨는 30시간의 비행 끝에 17일 리우에 도착했다. 손씨는 “2년 전 국내 대회에서 박인비 선수의 사인 볼을 받은 뒤 팬이 됐다. 손가락 부상을 이겨내고 올림픽에 출전한 박 선수를 응원하기 위해 비행기를 탔다”고 말했다. 손씨의 여정은 박인비의 용품 지원사인 던롭에서 후원을 하면서 이뤄졌다. 던롭은 이번 올림픽에 5명의 원정 응원대를 파견했다. 손씨와 동행한 남궁광열(45)씨는 “생애 가장 긴 여행이었지만 힘들지 않았다. 박인비 선수의 경기가 끝나면 전인지 선수의 경기를 응원했다. 한국 선수들이 잘해줘서 피곤한 줄도 모르겠다”며 웃었다.


리우=이지연 기자 easygolf@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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