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의식 않고 사는 건 큰 실수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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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죽음에 관한 산문집이 국내 출간된 영국의 맨부커상 수상작가 줄리언 반스. “읽을 때마다 새롭게 읽히는 소설을 쓰고 싶다”고 했다. [사진 Granham Jepson]

영국의 줄리언 반스(70)는 베스트셀러 소설가는 아니다. 그런데도 ‘세계의 이야기꾼’에 포함시킨 것은 문학세계의 다채로움 때문이다. 국내에 나란히 소개된 그의 장편 『플로베르의 앵무새』와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과연 같은 작가의 작품인지 헷갈릴 정도로 형식·구성이 딴판이다.

『웃으면서 죽음을…』 국내 출간 인기
실험소설·추리·산문 넘나들어
소설 『예감은 틀리지…』 맨부커상
“30년 문학동료 아내와 사별했지만
아직도 내 곁에 존재한다고 믿어
문학은 웅장하고 아름다운 거짓말
종종 과학보다 더 진실하고 심오해”

1984년 출세작 『플로베르…』가 소설이라는 예술 장르의 표현 한계를 극한까지 밀어붙인 실험적인 작품이라면 2011년 맨부커상 수상작인 『예감은…』은 추리소설에 가깝다. 요컨대 그는 구성진 서사로 독자를 사로잡는 이야기꾼이라기보다는 청중에 따라 얼굴 표정과 개인기를 바꾸는 ‘영악한’ 변사 스타일이다.

반스는 옥스퍼드에서 공부하고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지만 결국 작가가 됐다. 소설이 세상의 진실을 드러낸다고 믿는 진지한 작가지만 추리소설도 여러 편 썼다. 2008년 사망한 아내 팻 캐버너의 이름을 딴 댄 캐버너라는 필명으로다. 모든 소설은 각 작품에 들어맞는 나름의 형식이 있기 마련인데 모름지기 작가는 고통스럽더라도 그걸 찾아내야 한다고 믿는다.

자연히 그를 읽는 일은 쉽지 않다. 하지만 집중하고 따라가다 보면 강렬한 서사의 짜릿함과는 또 다른 지적인 뿌듯함을 맛볼 수 있다. 마침 죽음을 소재로 한 그의 2008년 산문집 『웃으면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법』(다산책방)이 최근 국내에 번역·출간됐다. 역시 촘촘하고 풍성한 책이다. e메일로 반스를 만났다.

늘 그랬던 것처럼 이번 책도 아내에게 바치는 헌사로 시작한다.
“우리는 30년을 함께 했다. 팻은 아내이자 내 문학 에이전트였다. 아내를 잃고 쓴 책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에 ‘누군가 죽었다는 건 그가 더 이상 살아 있지 않다는 의미이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라는 문장이 있다. 아내는 아직도 나를 위해 존재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내 책을 바치는 건 당연하다.”
죽음을 소재 삼았다.
“한국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영국 사람들은 언젠가 자기들이 죽는다는 사실을 거의 의식하지 않고 산다. 임박해서야 생각하기 시작한다. 내 생각에 그건 큰 실수다. 죽음에 대한 이해 없이 인생을 이해할 수는 없다.”
책의 원제가 ‘Nothing to Be Frightened Of(아무 것도 겁낼 것 없다)’다. 책을 쓰고 나서 실제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덜게 됐나.
“죽음의 공포가 늘어나지도 줄지도 않았다. 변화가 있을 거라 기대하지도 않았다. 나는 지금의 인생이나 혹은 나중에 올 죽음에 대해 어떤 기분 전환을 하기 위해 책을 쓰지는 않는다. 작가가 그래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치유 효과가 있는 문학(therapeutic literature)의 가치를 믿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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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이 문학에서 위안을 찾는다. 작가 개인의 감정도 작품 속에 흘러들어가기 마련이다.
“내가 가장 흠모하는 작가인 프랑스의 플로베르(1821~80)는, 나도 동의하는 바이지만, 세상에 대한 어떤 감정을 없애기 위해 소설은 쓰는 건 수준 낮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소설은 개인적 감정을 쏟아내는 것보다 훨씬 진지한 행위라는 얘기다. 문학작품은 객관적인 어떤 것, 바깥 세상에 존재하는 잘 다듬어진 사물(object)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실패한 플로베르다. 여러 작품 안에 개인적 감정을 토해냈다.”

시의 정의는 시인의 숫자만큼 많다는 얘기가 있다. 마찬가지로 문학의 정의도 다양할 수밖에 없다. 반스는 문학이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에 ‘단순히 사실을 합쳤을 때보다 더 많은 진실을 말해주는, 웅장하고 아름다우며 정돈된 거짓말’이라고 발언한 적이 있다. 뉴욕에서 발행되는 문학잡지 ‘파리 리뷰’와의 인터뷰에서다.

인간과 세상의 진실을 캐는 일은 소설가보다 사회학자나 인문학자가 더 잘할 수 있지 않나.
“훌륭한 정신과 의사 친구가 하나 있는데 그 친구가 한 번은 그러더라. 아직까지 셰익스피어만큼 인간의 광기를 잘 이해한 사람은 없다고. 문학의 역설은 그것이 만들어진 허구의 세계인데도 종종 객관적인 과학보다 진실에 더 가깝고 심오하다는 점이다.”
추리소설도 썼는데 그 경험이 진지한 소설을 쓸 때 도움이 되나.
“그렇다 . 맨부커 수상작인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일종의 심리 스릴러다.”
영국식 유머를 하나 소개한다면.
“유머보다 실제 현실에서 마주치는 아이러니를 좋아한다. 가령 서양의 비뇨기과 의사들은 사람들의 관심을 환기하기 위해 2월 14일을 ‘국립 고자의 날(National Impotence Day)’로 지정했는데 이날은 바로 연인들의 축제일인 발렌타인데이다.”

작품 만큼이나 열린 세계관을 가진 반스는 “영국의 브렉시트(EU 탈퇴) 결정은 재앙”이라고 했다. 그 결정 직후 영국 축구대표팀이 유로 2016 아이슬란드와의 16강전에서 패배해 탈락한 데 대해 “EU 탈퇴에 걸맞는 대접을 받은 것”이라고 비꼬았다.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아직 못 읽었다”고 했다.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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