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우2016] 이게 공격수의 숙명…일어나라, 손흥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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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올림픽 손흥민은 온두라스와의 8강전에서 부지런히 그라운드를 뛰어다녔다. 그러나 아깝게 진 뒤 “패배의 책임은 나에게 있다. 후배들을 욕하지 말아 달라”고 말했다. 그라운드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는 손흥민. [벨루오리존치=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무릎을 꿇은 손흥민(24·토트넘)은 그라운드에 얼굴을 파묻고 눈물을 쏟았다. 동료들이 부축했지만 다리에 힘이 풀린 듯 다시 주저앉았다. 아쉬움을 견디다 못해 그라운드에 ‘큰 대(大)자’로 드러눕기도 했다. 손흥민의 눈물은 경기가 끝난 뒤에도 한참 동안 멈추지 않았다.

온두라스에 0-1 패배 4강 좌절
8개 슈팅 골키퍼 선방에 번번이 막혀
“제가 경기 망친 것 같아 죄송” 눈물
안정환 “메시도 골 못 넣으면 욕먹어”
온두라스, 후반 15분 선제골 넣은 뒤
부딪히면 벌러덩 ‘침대축구’ 일관

한국 올림픽 축구대표팀은 14일 브라질 벨루오리존치의 미네이랑 경기장에서 열린 리우 올림픽 남자 축구 8강전에서 북중미의 복병 온두라스에 0-1로 졌다. 2회 연속 올림픽 4강행의 꿈도 사라졌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 4강전에서 브라질이 독일에 1-7 참패를 당해 유명해진 미네이랑 경기장은 한국 축구에도 비극의 무대가 됐다.

슈팅 수 16-6, 볼 점유율 64%-36%. 한국은 경기를 지배했지만 골 맛을 보지 못했다. 결정적인 슈팅이 온두라스의 단신(1m80㎝) 골키퍼 루이스 로페스의 선방에 잇따라 막혔다. 그리고 후반 15분, 역습 한 방에 수비라인이 무너졌다. 상대의 빠른 돌파에 당황해 우왕좌왕하다 알베르트 엘리스(20·올림피아)에게 실점했다.

이후엔 지루한 ‘침대 축구’가 이어졌다. 온두라스 선수들은 우리 선수들과 몸이 닿기만 하면 그라운드에 드러누웠다. 후반 44분 쓰러진 엘리스가 다시 일어서기까지 걸린 시간은 3분이 넘었다. 경기를 중계한 이영표 KBS 해설위원은 “저런 장면을 보여주는 건 전파 낭비”라고 일침을 가했다. 브라질 현지 관중은 스포츠맨십을 저버린 온두라스에 야유를 보내며 한목소리로 “코리아”를 외쳤다. 거듭된 ‘침대 축구’에도 불구하고 후반에 주어진 인저리 타임은 3분. 종료 휘슬이 울리자마자 손흥민이 달려가 주심에게 강하게 항의했지만 이미 경기는 끝난 뒤였다.

손흥민은 전반 37분 날카로운 프리킥, 전반 추가 시간 발리슈팅 등 8개의 슈팅(유효 슈팅은 5개)을 시도하며 공격을 이끌었지만 골 맛을 보지 못했다. 후반 14분에는 실점의 빌미가 된 패스 미스를 저질렀다. 경기 후 믹스트존(공동취재구역)에 등장한 손흥민의 눈은 퉁퉁 부어 있었다. 서러움이 가시지 않은 듯 손흥민은 울먹이며 어렵게 말을 이어갔다.

“제가 경기를 망친 것 같아 국민들께 너무 죄송해요. 너무 미안해서 동료들의 얼굴도 못 봤어요. (잠시 말을 멈춘 뒤) 심판에게 항의한 건 조금이라도 희망의 끈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였어요. 국민 여러분들 실망이 크시겠지만 어린 선수들에게 너무 많은 비난을 하지 말아주셨으면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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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월드컵 브라질 월드컵 알제리전 도중 골 찬스를 놓치고 아쉬워하는 손흥민. [중앙포토]

2년 전인 2014년 6월 24일, 포르투알레그리에서 열린 알제리와의 브라질 월드컵 조별리그 H조 2차전 직후에도 손흥민은 울었다. 이날 한국은 알제리에 2-4로 참패했다. 손흥민은 월드컵 데뷔 골을 넣는 등 고군분투했지만 웃지 못했다. 당시 믹스트존에서 취재진과 만난 손흥민은 “월드컵 데뷔 골은 중요하지 않다. 팀이 진 게 마음이 아프다”며 고개를 숙였다. 당시엔 A대표팀 막내가 흘리는 아쉬움의 눈물이었다면, 이번엔 올림픽팀 고참의 책임감을 담은 눈물이었다. 이번 대회를 앞두고 “2년 전처럼 눈물을 흘리지 않겠다”던 손흥민의 다짐은 지켜지지 않았다.

경기장에서 만난 안정환 본지 해설위원은 “기회가 왔을 때 골을 넣어야 이길 수 있다. 축구의 승부는 단순하고도 냉정하다”며 “호르헤 루이스 핀토(64·콜롬비아) 온두라스 감독이 2년 전 브라질 월드컵에서 코스타리카의 8강 돌풍을 이끌 당시 사용했던 ‘선수비 후역습’ 전술에 우리도 당했다”고 했다. 그는 또 “여러 차례 골 찬스를 놓친 손흥민이 비난을 받고 있지만 이는 공격수의 숙명이다. 리오넬 메시(29·아르헨티나)도 네이마르(24·브라질)도 골을 못 넣으면 욕을 먹는다. 이겨내야 한 단계 성장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8강 탈락과 함께 메달권에 진입할 경우 선수들에게 주어지는 병역 혜택도 물거품이 됐다. 일부 팬은 손흥민의 얼굴에 프로축구 군팀 상주 상무 유니폼을 합성한 사진을 인터넷 게시판에 올렸다. ‘손흥민이 메달 대신 군번줄을 목에 걸었다’는 비아냥도 쏟아졌다. 신태용(46) 올림픽팀 감독은 일부 팬의 과도한 비난에 대해 아쉬워했다. 신 감독은 “어느 누가 골을 넣고 싶지 않겠는가. (손)흥민이가 너무 가슴 아파하고 있다”며 “지금 우리 선수들에겐 위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벨루오리존치=박린 기자 rpark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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