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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취재일기

역사 교육 놓친 수능 한국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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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백민경
백민경 기자 중앙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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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민경
사회1부 기자

고3 학생이 지난 6월 치른 수능 모의평가 한국사 4번 문제를 요약하면 이렇다. “수군에선 이순신, 의병에선 곽재우가 활약했다. 명나라가 참전했다. 어떤 전쟁의 전개 과정인가? ①임진왜란 ②병자호란 ③만주사변 ④청일전쟁 ⑤러일전쟁.”

문제는 임진왜란 당시의 시대상, 조선 수군이나 의병 활동의 역사적 의미를 묻지 않는다. 그저 ‘이순신-임진왜란’이라는 연결 고리만 알면 답을 맞힐 수 있다. 다른 문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 고3 학생은 “2분 만에 20개 문제를 다 풀었다. 한국사는 열심히 공부할수록 손해”라고 말했다.

올 11월 치르는 수능부터 모든 수험생이 한국사를 치러야 한다. 젊은 세대의 역사 인식을 제고한다는 취지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학교 역사 수업엔 질문이 사라지고, 학원가엔 10일 완성, 10시간 속성 코스가 등장했다(본지 8월 11일자 12면). 짧은 기간, 그저 외워 풀 수 있는 문제가 출제되면서 생긴 부작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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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중앙일보 기사엔 다양한 댓글이 달렸다. “쉽고 단순한 문제를 내면 역사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는다”고 걱정하는 목소리가 컸다. 동시에 “수험생 부담을 고려해 꼭 필요한 부분만 내는 게 좋다“는 주장도 이어졌다.

한국사가 수능 필수과목이자 절대평가 방식으로 치르게 된 과정을 돌아보면 둘 다 일리 있는 이야기다. 국사가 수능 필수과목에서 제외되자 응시율은 6.9%(2011 수능)까지 떨어졌다. 서울대가 국사를 필수로 지정해 최상위권이 몰리자 불이익을 염려한 다수 학생에겐 기피 과목이 됐다. 이를 우려하는 여론에 힘입어 2013년 한국사를 수능 필수과목으로 지정키로 했다. 하지만 “수험생의 학습 부담을 늘린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자 절대평가 방식이 채택됐다.

문제는 ‘모든 학생이 배워야 한다’(수능 필수과목)와 ‘수험 부담을 줄이자’(절대평가)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던 사이 역사 인식 제고 라는 애초의 목적을 놓쳤다는 점이다. 이미 수험생 사이에선 “초등 생용 만화책으로 대비해도 충분하다” “수업 시간에 영·수 문제를 푸는 게 낫다”는 말이 나온다.

역사 교사들은 “쉬운 수능을 유지하더라도 단순 지식 대신 사고력과 이해력을 측정하는 문제를 내라”고 제안한다. ‘이순신-임진왜란’ 식의 문제에서 벗어나 역사에 흥미를 느낄 수 있는 문제를 출제하라는 주문이다. 교육부가 토론·스토리텔링 수업 등 역사 수업 개선을 고민해야 한다고도 지적했다.

한국사 수능 필수는 역사 교육 살리기의 ‘첫 단추’에 불과하다. 10일 만에 ‘완성’하고 수능 끝나면 잊고 마는 ‘가짜 공부’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 학습 부담을 줄이면서도 살아 있는 역사 교육은 교육당국, 교사의 진지한 고민과 노력을 요구한다.

백민경 사회1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