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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재
이정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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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재
논설위원

내 이름은 사외이사 A. 나는 요즘 밤잠을 설친다. 먹어도 먹는 것 같지 않다. 다 대우조선해양 때문이다. 정말 그땐 몰랐다. 그 잘나가던 대우조선이 이렇게 망가질 줄은. 그래놓고 가짜 장부로 수조원의 부실·부패를 감췄을 줄은. 일을 저지른 건 사장·임원인데, 그 바람에 나까지 한통속으로 몰려 거액의 소송을 당할 줄은. 그 좋다는 사외이사 한 번 했다가 패가망신하게 생겼으니 이렇게 억울할 데가 없다. 그러므로 나같이 불행한 사외이사가 이 땅에 다시는 없기를 바라며 이 글을 남긴다.

내가 대우조선 사외이사를 맡은 건 2012~2013년 2년이다. 딱 고재호 전 사장 때다. 알려진 대로 2012년부터 3년간 순자산 약 5조7000억원, 영업이익으로는 2조7000억원의 회계장부 조작이 있었다. 담당 회계법인은 ‘추정오류’라고 주장하지만 검찰은 ‘분식회계’로 본다. 이게 분식회계로 결론 나면 미칠 파장이 어마어마하다. 관련자들은 오래 감옥살이를 해야 할 것이며 수십억~수백억원을 물어줘야 한다. 회사문을 닫아야 할 수도 있다.

벌써 줄소송이 일고 있다. 소액주주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만 지금까지 8건, 약 300억원대다. 지금까진 사장·임원만 고소했는데 지난달엔 처음으로 사외이사도 걸고 넘어졌다. 소송액은 36억원. 앞으로 더 늘어날 것이다. 이건 새 발의 피다. 국민연금(489억원)·사학연금(147억원)·공무원연금(73억원)도 거액의 소송을 냈다. 사외이사까지 포함했다. 여태 그런 적이 거의 없었는데 이번엔 예외다. 재판 결과에 따라 이 돈을 다 물어줘야 할 수도 있다. 전 재산을 탈탈 털어도 어림없는 금액이다. 친구들은 “설마 사외이사까지 책임을 묻겠느냐”며 위로하지만 아니다. 요즘 재판은 사외이사에 대해 점점 엄격해지는 추세다. 집행 임원 못지않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대법원 판결이 여럿 나왔다. 걱정이 태산이다.

물론 대우조선이 임직원 배상 책임보험을 들어놓기는 했다. 하지만 어림없다. 총 보상한도가 300억원이다. 모자라는 돈은 회사나 당시 관련자가 물어내야 한다. 나는 정말 억울하다. 내가 왜 관련자인가. 물론 돈은 좀 받았다. 회의비·거마비조다. 1년에 약 6000만원, 2년간 고작 1억여원이다. 그 돈 받고 수십억원을 물어주라는 게 말이 되나.

백번 양보해 거수기 노릇한 게 잘못이라 치자. 어디 나만 그런가. 사외이사가 본래 그런 자리 아닌가. 한 경영분석 기관이 30대 그룹 180개 계열사 이사회를 분석했더니 사외이사의 안건 찬성률이 99.6%에 달했다고 한다. 전부 거수기란 얘기다. 게다가 분식회계 적발이 어디 쉬운가. 사장과 담당임원이 숨기려고 작심하면 귀신도 모른다. 하물며 달랑 한 달에 한 번꼴로 이사회 참석해 회사가 던져 주는 서류나 들춰보는 게 전부인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실력도 없고 전문가도 아니면서 왜 했느냐고? 자업자득이라고? 그것도 말이 안 되는 소리다. 어디 나만 그런가. 대우조선이 산업은행 자회사가 된 뒤 선임된 사외이사 중 60%가 관피아 또는 정피아다. ‘그놈이 그놈’ 나머지도 다 연줄이다. 죄다 낙하산이라고 봐도 된다. 사외이사는 원래 외환위기 직후 재벌의 방만·부실 경영을 막자고 도입한 제도다. 지금은 선심성 자리로 전락했다. 정권에서 신세진 것 갚는다며 내려주는 자리가 된 지 오래다. 임명권은 해당 회사가 3분의 1, 금융위원회가 3분의 1, 청와대가 3분의 1씩 행사한다는 게 정설이다. 정권에 지분이 제법 있으면 공기업 경영자(CEO), 약간 있으면 공기업 감사, 애매하면 사외이사. 이게 소위 ‘낙하산 3종세트’ 아닌가.

올 연말까지 줄잡아 50곳의 공공기관 CEO가 바뀐다고 한다. 사외이사는 더 많이 바뀔 것이다. 벌써 한자리하겠다고 뛰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무릇 사외이사를 노리는 정피아, 관피아, 금피아들이여.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전문가인가? 거수기 노릇 안 할 각오는 돼 있나? 아니라면 포기하라. 나를 보라.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 쉽게 안락한 노후를 꿈꾸다가 순식간에 지옥의 노후를 맞을 수 있다.

이정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