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 북으로 간 연예인들의 이야기|유랑극단소녀서 은막의 스타로|문예봉의 성장과정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앞 (전회) 에서 문예봉의출생과 성장과정이 몹시 불우했다고 말했다.
어떻게 불행했던가? 여기서 스타의 불우한 과거를 잠시 알아보기로 한다.
처량한 달밤-. 손님을 부르는 나팔소리가 구슬프다.
야산 기슭과 들판에 옹기종기 처마를 맞댄 초가들에서 어른·아이들이 쏟아져 나와 나팔소리가 울리는 마을 어귀 천막극장으로 모여든다.
이윽고 유랑극단의 엉성한 가설무대에서는 신파 연극의 막이 으르고 남녀 배우들의 열연이 시작된다.
이튿날 이 유랑극단은 무대를 헐어 당나귀 등에 싣고 나머지 도구들은 남자배우들이 등에 지고, 여자배우들은 자신들의 소지품을 머리에 이고 하루에 보통 40∼50리씩 걷는다.
유랑극단은 예정된 다음 흥행장소로 가 또 천막을 치고 고달픈 연극을 해야 그날의 생계가 해결된다.
지금으로부터 60여년 전인 1920년대 초 암울한 일제 통치하의 이 땅에는 이같은 유랑극단이 꽤나 많았다. 당시 「연극시장」 이라는 이름의 유랑극단에는 다음 흥행지를 찾아 떠날 때마다 극단의 살림을 실은 당나귀 등에 3, 4세 쯤 된 어린 계집아이 하나가 언제나 졸고 있었다.
이 계집아이는 연극이 시작될 때부터 끝날 때까지 무대분장실 한구석 포장 속에서 울기도 하고 혼자 놀기도 했다.
이 아이가 바로 문예봉 .16세 되던 1932년 일본에서 영화연출 기술을 연구하고 돌아온 신진 이규환감독의 처녀작품 『임자없는 나룻배』 에 출연, 일약스타가 되는 문예봉이다.
문예봉의 아버지는 당대의 중견배우 문수일. 그는 유랑극단 「연극시장」 익 단장이었다. 문수일 은 의지가 강할 뿐 아니라 외모도 준수한 사람이었다. 그는 소년기에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고, 또 보통학교도 나온 터여서 당시로서는 학식있는 사람으로 통했다.
그는 또 일찌기 연극에 취미를 갖고 그 길로 정진하여 우리나라 연극 개화기의 신예 배우들이었던 변기종· 최성해· 나효진· 강홍직· 이종철·신은봉(여배우)·이애리수 (여배우겸 가수)등과 어깨를 겨루는 연극배우가 되어 활동했다.
문수일 은 뜻한바 있어 얼마되지 않은 가산을 털어 스스로 유랑극단 「연극시장」을 만들어 삼천리 방방곡곡을 유랑하며 연극을 했다.
레퍼터리는 『눈먼 동생』『낙화류수』 『운명의 종소리』 『아리랑 고개』 등으로 전형적인 신파극이었지만 그중에는 일제의 식민정책에 짓눌린 민족의 눈물과 하소연을 은연중 표현한 내용의 것도 있었다.
문예봉의 아버지 문수일은 지금으로 보면 시대의 선구자요, 훌륭한 예술가지만 그는 빈곤파 천대와 멸시와 게다가 일제 관헌의 감시 속에 유랑극단을 이끌어갔다.
문수일의 본처는 화봉과 예봉 두 딸을 남기고 일찍이 사망했다. 문수일은 유랑극단의 여배우와 재혼했다.
문수일은 장녀 화봉은 친척집에 맡겨두고 어린 예봉만 데리고 다녔으며 예봉은 시골 여관방에서, 혹은 가설무대의 포장 속에서 새우잠을 자며 계모의 사랑도 못받는 환경 속에서 외롭고 슬프게 자랐다.
예봉은 다섯살 되던 해부터 가설무대에 출연하는 아역배우가 되었다. 출연하기 싫어하는 눈치만 보여도 무서운 눈총과 주먹이 날아들었다. 어린 예봉은 고사리 손으로 눈물을 닦아가면서 손발이 얼어붙는 엄동설한에도 가설무대에 나서서 가르쳐준 대로 연기동작과 대사를 되풀이 해야했다.
그러는 사이에 문예봉은 어린애에서 처녀로 자라고, 앞가슴이 부풀어 오르고 엉덩이가 퍼져갔으며 무대에 나서면 제법 관객의 시선을 끌게 되었다.
문수일은 「연극시장」을 이끌고 수많은 고개를 넘고 넓은 들을 가로질러 극단 식구들과 함께 고달픈 유랑을 계속했지만 그래도 생계가 어려워 연기자들은 하나 둘씩 떨어져 나갔다.
마침내 1931년 문수일은 함경북도 청진 근처에서 「연극시장」을 해체해 버리고 자신은 청진형무소의 고용원 (임시 사무직원) 으로 취직했다.
연극배우이자 유랑극단 단장이 형무소의 고용원으로 들어간 것은 얼른 납득이 안가는 일이다. 그러나 당시 문수일은 낯선 타향에서 당장 식구들의 호구지책이 다급했던 것이다. 그는 마침 청진형무소에서 임시 사무직원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고 달려갔던 것이다.
그러나 문수일은 당초에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몇 달 만에 그 노릇을 그만두고 뛰쳐나와 당시 배일운동 협의로 청진형무소에 투옥되었다가 출옥한 동료 연극인 윤봉춘의 도움으로 약간의 자금을 마련, 「연극시장」 을 재건했다.
때마침 일본에서 돌아온 이규환 감독이 그의 첫 작품으로 『임자없는 나룻배』 의 연출을 맡게 됐다. 한국실정을 잘 모르는 그는 나운규와 배역 문제를 의논, 우선『임자없는 나룻배』 의 주인공으로 나운규의 출연을 승낙받았다.
그리고 나룻배 사공인 나운규의 딸 역을 의논했다.
이규환감독은 『현재 자천타천의 여배우들이 몇 있지만 이 배역에 적합한 사람이 없으니 한번 물색해보라』고 했다.
그러자 나운규는 선뜻 문예봉을 소개했다. 영화에는 한번도 경험이 없지만 무대에서 연기하는 것을 몇번 보았는데, 우선 마스크가 청순하고 나이에 비해 연기력도 있어 보인다고 했다.
유랑극단의 소녀가 은막의 신데렐라로 변신하는 순간이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