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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우상화 극영화 8편 제작|북한, 최은희·신상옥 부부 납치 후 혹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최·신 부부가 만든 영화>
78년 납북된 최은희·신상옥 부부는 북한에서 지금까지 8편의 영화를 만든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이들 영화 모두가 「김일성·김정일의 우상화와 주체 사상 선양」에 초점을 맞춘다는 당의 방침에 충실히 따른 것들이다.
80년대 들어 이들 부부가 설립한 「신 필름 영화 촬영소」는 『돌아오지 않는 밀사』『탈출기』『철길 따라 천만리』『길』『소금』『헤어져 언제까지』『붉은 날개』『광주는 부른다』등 8편의 극영화를 제작했다.
이 영화들은 대한 적개심 고취·공산주의 우월 사상 등을 위해 제작되었는데, 그중 특히『돌아오지 않는 밀사』『탈출기』 등 2편은 동경·파리·LA등지에서 상영되어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돌아오지 않는 밀사』는 북한의 『혈분만국회』라는 무대 연극을 영화화한 것으로 1907년6월 고종 황제가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 평화 회의에 파견한 밀사 사건을 사대주의적 발상이라고 몰아붙이는 것을 기둥 줄거리로 하고 있다.
당시 사건의 주역인 고종과 이준 열사 등을 사대주의적 포로로 몰아붙이면서 『만약 그 시대에 김일성이 있었더라면, 그리고 김일성의 위대한 혁명 사상과 지도 이념에 따라 당시의 애국자들이 행동했더라면 나라의 독립은 이룩되었을 것』이라는 역사 왜곡의 김일성 우상화의 정치 선전을 펼치고 있다.
『탈출기』는 일제하에서 살길을 찾아 간도에 간 한 청년이 그곳에서도 살수 없어 집을 탈출해 불합리한 사회에 항거하게 된다는 줄거리로 대남 모략 선전용뿐만 아니라 청소년들의 대남 적개심 고취를 위해 현재 널리 상영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철길따라 천만리』는 한 철도 근로자의 일대기를 일제 때 억압받던 시기와 현재 북괴에서 보람찬 생활을 하는 시기로 비교, 미화시키며 사랑과 행복을 가미한 공산주의 우월성 선전영화다.
그 밖에 『길』은 한 여성 운전사의 기구한 일생을 통해 오직 당과 김일성만이 개인의 운명을 보살펴 줄 수 있다고 하는 당 선전 영화.
이밖에도 『헤어져 언제까지』는 이산가족의 만남을, 『붉은 날개』는 비행사의 충성심을, 『광주는 부른다』는 1929년 광주 학생 운동 사건을, 『소금』은 일제 강점하의 항일 투쟁을 그린 것이다.
북한이 부르고 있는 신상옥과 최은희의 공식 직함은 「신 필름 총장」「신 필름 부총장」이다. 그러나 영화 제작에 필요한 인력, 기자재 및 대본 등은 모두 기존의 「조선 예술 영화 촬영소」 (북한 정무원 문화 예술부 소속)나 「조선 2·8 영화 촬영소」 (북괴군 소속) 등에서 공급해 주고 있었다.

<최·신 부부의 최근 동정>
신상옥씨는 작년 말 일본 요미우리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최근까지 최·신 부부의 영화 제작 활동에 대해 비교적 소상히 털어놓았다.
이에 의하면 최·신 부부는 북한·몽고·체코 등과 합작, 최근까지 『칭기즈칸』을 제작하고 있었다. 신상옥씨가 총감독을 맡았고 최은희씨는 「테무진」 (칭기즈칸의 아명)의 어머니 역을 맡았다.
최·신 부부가 북한에서 만든 첫번째 영화는 알려진대로 『돌아오지 않는 밀사』였으며 이 영화는 체코의 파란돌프 촬영소에서 찍었고 일부 옥외 장면은 북한 로케이션으로 찍었다.
최·신 부부는 선전·선동으로 얼룩진 북한 영화에 자신들이 새바람을 불어넣었다고 자부했고, 특히 동구권일지언정 국제 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것을 크게 자랑삼아온 것으로 전해졌다.
최은희씨는 『어머니』로 모스크바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고 작년 같은 영화제에서 『소금』에서의 연기로 헝가리 여배우와 함께 공동 여우주연상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베를린 영화제에서 시사회를 가진 『심청전』은 작년에 완성된 최신작.
신상옥씨는 이 인터뷰에서 영화를 만들 때 배우들이 각각 소속이 달라 사람을 빌려주지 않을 뿐 아니라 이 수속을 밟는데만 6개월이 걸리고 평양시 바깥을 나가려면 허가를 받아야 하는 등 제작상의 고충이 많다고 털어놓았다는 것이다.

<북한 영화란?>
70년대 이후 김일성 우상화·호전성 고취 일색의 영화를 한해 평균 20여편 제작했던 북한영화계는 7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대외 선전용 영화의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지만 기술습득이 용이치 못했다. 그러나 모든 영화를 호전적 혁명 사상하에서 제작해 영화 예술의 본질까지 파괴하는 그들에 대해 같은 공산국가들의 영화인들도 기술 전수를 외면해 이들의 영화 기술 축적은 더욱 어려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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