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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의 초대 거절하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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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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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현
서울대 교수·철학과

미소를 상징하는 로고가 노란 바탕에 인쇄돼 눈을 피곤하게 할 정도로 거리에 넘쳐나던 때가 있었다. “걱정하지 마, 행복해야 해(Don’t Worry. Be Happy)”라는 노래가 유행한 것도 그 무렵이었던 것 같다. 로고와 노래는 식상해져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져 가도 행복에 대한 욕망은 반대의 길을 걸어 왔다. 주위를 돌아보면 행복을 위한 지침서가 서점에 넘치고, 행복을 찾아 떠나는 여정을 소개하는 여행사 전단지가 발에 차인다. 행복은 보편적 종교가 돼 우리의 무의식을 지배해 행복하지 않다면 지금까지 인생을 잘못 살아왔다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행복하려면 쾌락보다 용감하게 자신의 가치를 추구해야
행복하지 않겠다는 결기까지 필요하다면 미친 소리일까

그런데 행복한 삶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막연한 이미지에 머물러 행복이 무엇인가를 물으면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린다. 대부분의 이데올로기가 그렇듯이 행복도 개인의 성찰을 용납하지 않은 채 시대의 흐름을 구성하며 사람들을 떠밀어 간다. 행복에 대한 욕망이 우리네 정신을 지배하는 시대에 우리는 어떤 흐름에 몸을 싣고 있는 것일까?

공자와 장자는 인륜의 도와 자연의 섭리를 성찰하고, 그에 합치하게 삶을 영위하는 데 행복이 있다고 생각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고유한 이성과 성찰의 능력을 귀하게 여겨 행복이란 삶을 이성적으로 성찰하며 인간의 덕을 실현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모두 행복은 감각의 영역이 아니라 이성적 성찰을 통해 얻어지는 의미와 가치의 영역에 있는 것으로 보는 점에서 궤를 같이한다.

행복을 의미와 가치의 실현에 있는 것으로 보는 생각은 근대에 오면서 변화한다. 개인이 해방되면서 개인의 쾌감·즐거움 등은 이성에 의해 통제돼야 할 것이라는 질곡에서 벗어나 개인의 자유로운 권리로 간주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모나리자의 미소를 당당히 화폭에 담음으로써 엄숙주의적 문화에 작별을 고하고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알린다. 과학과 산업의 발전은 최소의 투자로 최대의 재화를 생산해 인간의 즐거움을 최대한 만족시키는 쪽으로 역사의 방향을 정하고, 소비를 끊임없이 창출해야 하는 상업화된 세계는 쾌락의 추구를 종교화한다. 행복에 대한 우리의 생각도 발맞추어 변한다. 성찰적으로 자신의 가치를 실현하는 사람과 즐거움과 쾌감으로 충만한 삶을 사는 사람을 놓고 누가 행복한가 투표하면 오늘 대부분의 사람이 뒤의 사람에게 표를 던지는 이유다.

행복의 이름을 빌려 쾌락의 추구를 삶의 목적으로 권하는 시대, 그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이 나름 괜찮은 삶의 방식이 될 수 있을까? 답을 잘 모르겠다면 여기 힌트가 하나 있다. 심리학의 연구에 따르면 인간은 쾌감에 적응하기 마련이어서 시간이 지나면 같은 자극은 더 이상 쾌감을 주지 못하게 된다. 결국 더 강한 자극을 추구하게 되고, 다시 적응이 되면서 쾌락 추구의 과정은 계속 반복된다. 쾌락의 쳇바퀴에 올라타면 계속 앞으로 끊임없이 달려갈 수밖에 없다. 얼마 전 금전과 관련된 부정을 저지른 몇몇 법조계 인사가 세상을 시끄럽게 했다. 가질 만큼 가진 사람들이 왜 그런 부정을 저지를까 싶지만 시대가 유혹하는 쾌락의 쳇바퀴는 그만큼 강력하다. 이러한 삶을 과연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까?

쾌락의 추구가 갖는 함정을 예감한 철학자 제임스는 행복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행복이라는 목적은 그것을 직접적 목적으로 삼지 않을 때만 얻어질 수 있다. 자신의 행복이 아닌 다른 목표에 마음을 집중하는 사람만이 행복할 수 있다. 다른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에 행복은 따라온다. 당신 스스로에게 행복한가를 묻게 되면 행복은 사라진다.” 행복이 쾌락과 위험하게 가까워진 시대, 다시 한번 새겨볼 만한 말이다.

인생은 즐길 가치가 있다. 쾌락으로 대변되는 개인의 만족감이 죄책감 없이 삶의 요소로 편입되는 것은 환영할 일이다. 그러나 쾌락은 행복의 개념까지 변화시키며, 쾌락을 충족시키는 재화를 갖지 못한 삶은 어딘가 잘못되었다는 또 다른 죄책감을 만들어내고 있다. 마지막 날에 미소를 지으려면 시대가 권하는 행복에 무관심한 채 자신의 가치를 추구하는 용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행복하지 않겠다는 결기까지 필요하다고 하면 미친 소리처럼 들릴까?

김기현 서울대 교수·철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