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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임문영의 호모디지쿠스

‘토닥토닥’ ‘음성지원 됩니다’…디지털 세상에 온기 불어넣는 표현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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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예전에 ‘어니언스’라는 듀엣 가수가 있었다. 어니언스의 노래 중 유명한 곡이 ‘편지’인데 이렇게 시작한다. “말없이 건네주고 달아난 차가운 손~.” 제목은 편지인데, 편지에 뭐라 쓰여 있는지는 관심이 없었다. 어니언스는 대신 그 편지를 전해준 손의 감촉을 더 애틋하게 불렀다.

e메일에서 그런 차가운 손의 느낌이 날까. 아니면 가슴 두근거리는 떨림이 있을까. 낭만적인 가사, 입맞춤으로 부친 편지(Sealed with kiss)처럼 사랑이 느껴지는 것이 가능할까. 여전히 사랑하는 사람의 e메일과 문자메시지는 가슴을 뛰게 하겠지만 그 손길, 그 감촉, 그 가슴 저린 느낌은 똑같지 못할 것이다.

앨버트 머레이비언이라는 심리학자는 ‘머레이비언의 법칙’을 통해 이를 정의했다. 인간은 타인의 감정을 읽는 데 언어정보 7%, 청각정보 38%, 시각정보 55%를 활용한다는 것이다. 자세와 용모, 복장, 목소리 톤이나 음색, 제스처 등 대화 내용과 직접 관계 없는 요소가 정보의 93%나 차지한다는 얘기다.

그래서 메시지만 남고 대화의 느낌이 사라지면 그 대화는 완벽한 의사소통이 되지 못한다. 강아지도 잘못된 행동을 할 경우 어미개로부터 ‘머즐 컨트롤(muzzle control)’이라는 사회화 과정을 겪는다. 어미개가 강아지의 주둥이를 자신의 주둥이로 툭 치거나 살짝 무는 것이다. 말 못하는 동물도 눈치로 의사소통을 배운다. 인터넷 은어로 ‘넌씨눈’이란 것이 있다. ‘너는 XX 눈치도 없냐?’라는 뜻이다. 눈치는 글자로만 생기지 않는다. 오감이 다 작용하고 상황 맥락이 이해돼야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디지털 공간에는 서로의 눈빛과 목소리 같은 체감 정보를 느끼고 싶어하는 표현이 많다. ‘음성지원 됩니다’는 말이 있다. 글을 읽을 때 실제로 음성이 들린다는 뜻이 아니라 마치 목소리를 듣는 것처럼 실감 나는 글이라는 뜻이다. 또는 ‘~각(角)’이나 ‘~시점’이라는 표현도 자주 쓰는데 부족한 시각적 정황을 보완하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런 사진을 쓰면 고소각인가요?”라고 묻는다. ‘고소를 할 수 있다고 보는가?’라는 뜻이다. 축구 사진을 보여 준다면 “프리킥 할 때 골키퍼 시점”처럼 쓴다.

이런 시청각적 표현들이 강화되면 길에서 연예인이나 미인을 봤다는 글에 “그 시신경, 안구 삽니다”라는 댓글이 붙고, 날카로운 경제 전망을 하는 글에는 “님의 전두엽에 블루투스 켜주세요” 같은 첨단 익살을 보여 주기도 한다. 또 직장에서 힘든 일을 겪었다는 글에는 ‘토닥토닥’이라는 의태어를 이용해 글로나마 어깨를 두드려 위로를 보낸다. 모두 살아 있는 진짜 감각을 느끼고 싶은 표현들이다.

디지털 시대는 이런 진짜 감각을 잊어 버리게 한다. 모든 소음을 깨끗이 제거한 음악, 점과 잡티마저 완벽히 지운 미인의 얼굴, 관광객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 조용하고 아름다운 관광명소 사진. 우리는 그런 디지털 세계를 진짜로 착각한다. 이른바 하이퍼리얼리티(실제보다 더 실제 같은 가짜 이미지)다.

하지만 세상이 어디 그런가. 진짜 감각으로 경험하는 음악이란 늘 이런저런 소음 속에서 듣게 마련이고, 잡티와 기미가 끼어 있는 미인의 얼굴이 오히려 더 자연스럽다. 유명 관광지는 늘 북적대고 시끄럽다. 남녀도 그렇다. 능력 있고 잘생긴 데다 배려심도 깊은 순정남, 미모와 지혜를 겸비한 순정녀는 드라마 속에나 있는 거다. 그들이 기준이라면 현실 속 세상 남녀는 죄다 못난 사람이 될 뿐이다. 서로 못났다고 실망하고 비난하면 여혐(misogyny·여성혐오), 남혐(misandry·남성혐오)만 커질 뿐이다.

세상은 다양하다. 인구수만큼 인격이 있고, 연인 수만큼 사랑의 사연이 있다. 남자와 여자로만 규정지을 수 없는 인간사의 수많은 이야기는 우리가 못나고 부족하지만 진짜 인간이기 때문에 감동을 준다. 하이퍼리얼리티가 아닌 진짜 감각으로 만나는 현실을 사랑하자. 그게 진짜 사랑이다.

임문영 인터넷 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