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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10>제84화 올림픽 반세기|좌절이 긴 양정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2면

양정모가 국내 레슬링계의 주목을 끌기 시작한 것은 68년 전국체전을 통해서였다. 부산건국상고 2학년이었던 양정모는 학생부 밴텀급에 출전, 자유형과 그레코로만형을 모두 석권했던 것이다.
70년 동아대 체육과에 입학, 대표선수를 지낸 오정룡 코치를 만나면서 실력은 급성장하기 시작했다.
71년 동경에서 벌어진 세계주니어선수권대회에 한체급 올린 페더급으로 출전한 그는 자유형에서 2위, 그레코로만형에서 3위를 차지하며 국제무대에서의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72년 뮌헨올림픽을 앞두고 그는 심한 좌절감에 빠져 방황하기 시작했다.
올림픽파견 국가대표 최종선발진에서 강호 장경무를 꺾고 출전권을 따냈으나 당시 「소수정예」를 파견원칙으로 정했던 체육회가 최종엔트리 결정과정에서 플라이급과 밴텀급에서만 4명을 보내기로 하는 바람에 제외되었던 것이다.
양정모의 충격은 매우 컸던 모양이다. 거의 1년을 실의에 빠져 헤맸다. 항상 말이 없는 과묵한 성격에 술·담배도 별로 입에 대지 않는 그가 안으로만 울분과 실의를 삭이는 모습은 주변사람들을 몹시 애타게 했다. 이때 대표팀 정동구코치와 소속팀 오정룡코치의 무서운 질책과 따뜻한 격려는 시련을 이겨내는 채찍이 되었다.
『이런 못난 자식. 너의 쭈그러진 두 귀를 봐라. 매트 위를 굴러다니며 온갖 정열을 바친 흔적이다. 그걸 금메달과 바꾸지 못한다면 너무 억울하지 않느냐. 』『앞으로 국내엔 널 당할 선수가 없다. 그러니 더욱 훈련을 쌓아 몬트리올을 목표로 하라. 』 양정모는 훗날 이 말만큼 자기의 폐부를 찌른 것은 없었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양정모는 73년 테헤란에서 열린 아리아마배 대회에 출전, 은메달을 따냈다. 이어 74년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따냈고 75년에는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동메달을 차지, 사상처음으로 소련 (민스크) 하늘에 태극기를 휘날리게 했다.
11월 태능선수촌에서 강화훈련에 돌입, 혹독한 훈련을 감내했다. 체력이 뛰어난 반면 스피드가 느린 양정모는 정동구코치의 특별훈련을 받아야했다.
1주일에 두 차례씩 15kg짜리 재킷을 입고 불암산까지 8km를 왕복했고 한밤중 불시에 기상, 산중이나 얼어붙은 중랑천 위에 세워놓는 정신력 훈련도 거듭됐다.
양정모는 이때만큼 육체적 고통을 느껴본 적은 없다고 털어놓곤 했다. 몇 번이고 선수촌을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으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고 했다. 그러나 양정모는 이 고통이 훗날 환희와 영광으로 반드시 보상되어질 날이 있으리 라며 약해지려는 자신을 꼭꼭 다잡아 나갔다는 것이다.
과연 양정모는 민족의 숙원인 금메달을 따냄으로써 「겨레의 아들」로 이 땅의 운동선수 그 누구도 누려보지 못한 영광의 주인공이 되었다.
범국민적인 환영, 상금, 연금, 국민훈장, 『몬트리올의 금메달』이라는 노래의 제정등 물질적 보상도 그랬지만「건국후 최초의 금메달리스트」로 스포츠사의 한 페이지에 오르게된 것은 무엇보다 귀중한 영예가 아닐 수 없다.
양정모는 올림픽2연패를 목표로 그후로도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나 한국의 모스크바올림픽 불참결정으로 무산되었고 80년 8월 제5회 KBS배 전국아마레슬링대회를 끝으로 13년간의 선수생활을 종결지었다.
이 대회는 양정모의 세계제패를 기념, 창설된 것이어서 더욱 의의가 컸을 것이다.
현재 33세인 양정모는 조폐공사에서 과장 대우 참사로 있으면서 후배들을 지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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