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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시흥의 재발견…"한국 양명학의 고향은 시흥입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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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명학 연구의 권위자인 정인재 서강대 명예교수. [중앙포토]

경기도 시흥의 문화적 가치가 새롭게 재조명된다. 시흥문화원이 주최하고 한국양명학회와 시흥양명학연구회가 공동주관하는 양명학 학술대회가 7월 29일(금)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시흥시 생명농업기술센터 3층에서 열린다. 제목은 ‘시흥시와 한국 양명학’.

한국양명학회 '시흥시와 한국 양명학' 학술대회
시흥의 역사문화적 가치 새롭게 재조명하는 계기될 듯

양명학을 한국에서 토착화시킨 인물은 하곡 정제두(1649~1736)다. 하곡은 말년에 강화도에서 활동했기에 하곡학을 ‘강화 양명학’으로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하곡이 41세(1688)부터 60세(1708)까지, 그러니까 강화도로 옮겨가기 전에 20년 동안 살면서 한국 양명학의 씨앗을 뿌린 곳이 시흥 지역이었음은 그동안 전혀 주목받지 못했다. 이날 기조강연을 맡은 정인재 서강대 명예교수에 따르면 “양명학을 토착화시킨 하곡 정제두의 철학사상(하곡학)은 시흥에서 일어나(興) 강화에서 꽃(華)을 피웠다”고 밝혔다.

시흥의 역사문화적 가치를 높이는데 하곡학을 활용할 생각을 한 이는 시흥문화원 정원철 원장이다. 하곡이 시흥시 가래을 마을에 살면서 양명학을 집중적으로 공부했다는 사실을 밝혀낸 이는 심우일 소래고등학교 교사다. 이들은 2015년 7월부터 최근까지 세 차례에 걸쳐 정 교수를 초빙한 가운데 시흥시와 양명학의 관계를 검토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한국양명학회 차원의 본격 학술대회를 시흥문화원 주최로 시흥시에서 개최하게 된 것이다. 올해 4월에는 정 교수의 양명학 강의가 시흥문화원에서 여섯 차례 열렸고, 이어 5월에는 ‘시흥양명학연구회’가 창립되었다. 시흥에서 300여 년 간 끊겼던 하곡의 철학 전통을 다시 이어간다는 의미가 담겼다.

정 교수는 “주자학이 백성을 다스리는 선비 위주의 관학(官學)이었다면 양명학은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사민평등(四民平等)을 주장한 백성 중심의 민학(民學)이었다. ‘시흥양명학연구회’가 시흥시 자체에서 자발적으로 생겨났다는 점에서 의미가 매우 크다. 하곡의 철학정신을 이어받아 하곡학을 현대화시키면서 동시에 시흥시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양명학은 명나라 중기 왕수인(1472~1529)이 주창한 철학이다. 왕수인의 호를 따서 양명학이라고 부른다. 양명학은 주자학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데서 나왔다. 송나라 주희(1130~1200)에 의해 체계화된 주자학이 비판을 받는 것은 원나라 때 과거시험의 필수과목이 되면서부터다. 시험 합격이 주목적이 되면서 공부를 통해 성인(聖人)을 지향했던 유학(儒學) 본래의 생명력이 약화됐다. 이런 비판의 중심엔 양명학이 있었다. 양명학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양지(良知)의 실천, 즉 지행합일(知行合一)을 가장 중시했다.

주자학은 800여 년 간 중국뿐 아니라 동아시아의 사상계를 지배하게 되는데 조선은 그 정도가 특히 심했다. 중국은 명나라때 양명학이 새롭게 태동했지만 조선에서 양명학은 금기시됐다. 그같은 분위기에서 하곡이 시흥에 터를 잡으며 한국 양명학의 씨앗을 뿌렸던 것이다.

시흥에서 양명학 관련 기억해야할 인물은 하곡 말고 한 명이 더 있다. 시흥은 하곡에게 사상적 영향을 미친 계곡 장유(1587~1638)가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계곡 역시 일찍부터 양명학을 수용하면서 주자학의 편협성을 비판했다. 시흥이 한국 양명학의 고향이 되기에 손색이 없는 것이다.

정 교수는 양명학이 오늘의 사회 변화에 더 유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양명학은 유가의 인륜과 서양의 개인주의 사상을 잘 융합할 수 있습니다. 상명하복보다 수평적 인간관계를 지향하는 양명학이 오늘날 시민사회에 더 알맞은 철학입니다.”

배영대 문화선임기자 balanc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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