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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숙사회로 간다(2)|다원화 사회에 맞는 정치할 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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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한국정치의 과거와 현실을 말할때 흔히 비판과 반성이 많고 비관이 짙게 깔리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사회의 각 분야는 발전하는데 정치만은 낙후돼 있고, 그 정치의 낙후성이 다른 분야의 발전까지도 조건화 한다는 지적도 많다.
도대체 우리 정치의 낙후 원인은 무엇이며 이를 탈피하여 성숙한 정치가 될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인가.
이런 기조에서 이번 좌담회는 진행됐다.
우선 「성숙한 정치」란 무엇인가 하는 점부터 규명돼야 할 것이다.

<민생문제는 뒷전에 「위기」에 사로잡혀>
「정치」란 사회내의 가치를 배분도 하고 사회가 가야할 목적 설정도 하는 등 전체사회를 관리하고 운영하는 것을 말하며, 또는 사회내의 각종의 사회집단 계층들을 생산적인 방향으로 동태적으로 작동시키거나 또는 이들간에 이해의 대립 갈등 알력이 생겼을 때에는 이를 잘 해결해서 전체사회를 조화있게 조정·통합시키는 것을 가리킨다고 일단 정의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정치」가 「성숙한 정치」가 되려면 정통성과 도덕성을 갗추어야 한다.
정치의 정통성이란 정치의 권위가 시민 대부분에 의해서 인정받는 것을 가리키고, 정치의 도덕성이란 정치가 시민 대부분이 바라는 방향으로 운영됨을 뜻한다. 따라서 정치가 정통성·도덕성을 갖추지 못할 경우 정치의 하위체계내에서는 역작용이 생기고 정통성 도덕성시비에 시간과 정력이 탕진되며 생산성있는 정치를 하는데에 지장을 받게 되는 것이다. 정치가 정통성 도덕성을 갖추기는 용이한 일이 아니지만 그것을 축적해 가는 것을 「성숙한 정치」라 할 수 있다.
정치는 크게 체제문제를 따지는 정치와 민생문제를 따지는 정치로 나누어서 고찰 할 수 있다. 전자는 시민의 기본권 (언론 출판 집회·결사의 자유 등)의 보장, 사회집단의 활성화, 정당 의회의 활성화, 집권당과 야당간의 균형발전 등 소위 민주화를 따지는 것을 가리키고 후자는 사회경제발전을 추진하며 교육정책을 통해 국가의 백년대계를 추구하고 사회복지 농민대책을 통해 사회내의 어두운 부분의 문제들을 풀어나가는 것등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 두가지의 정치중 어느 정치에 더 역점을 두느냐 하면 나라마다 다르다. 체제문제·민주화 문제가 대체로 해결되어 여기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도 되는 선진 민주국가에서는 「정치」하게 되면 「민생문제」가 관심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체제문제가 제대로 해결되지 않은 나라에서는 민생보다 체제문제에 관심이 집중되기 때문에 민생문제는 뒷전으로 밀리게 마련이다. 한국도 그러한 나라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한국정치는 특히 체제문제·민주화 문제로 씨름하고 있고, 관심의 대부분을 이 문제에 쏟고 있는 나머지 생산성 있는 정치를 못하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한국정치의 지나간 40년사를 돌이켜보면 정통성 문제가 가장 큰 문제였다.
한국정치는 1948년 제1공화국 정부가 수립될 때부터 극우파 보수파만이 정치에 참여하고 나머지 대부분의 세력을 「장외」에 남겨두었기 때문에 정통성과 합법성의 문제를 안고 있었다.
제2공화국 때에는 정부가 「장외」세력인 학생들의 눈치나 보다가 붕괴되었으며, 5·16 이후의 제3·4공화국 때에는 정부가 사회경제발전을 강력히 추진함으로써 정통성 합법성을 회복하는데에 어느 정도 성공하였으나 역시 3선개헌 유신체제에 의해 정통성의 기반이 무너지고 말았다.

<수평적 정권교체도 가능한 풍토 바람직>
지금껏 한국정치는 현실적으로 세가지의 「위기」에 사로잡힌 나머지 생산성 있는 정치를 못해왔다고 볼수 있다.
세가지의 「위기」란 분단 때문에 생기는 위기로 총력안보 정치안정 사회안정등을 우선시하는 「종합위기」, 평화적 정권교체 한번 실현시켜 보지 못해 정치가 이문제를 중심으로 맴돌고 다른 문제에는 응분의 관심을 나타내지 못하는 「정통성의 위기」, 그리고 사회경제적으로 성장은 하고 있으나 그 성장이 왜곡되고 심각한 소득불균형의 문제를 안고 있는「발전위기」를 가리킨다.
토론과정에서는 최근 정부-여당에서 제기한 「큰정치」론도 언급돼 보다 성숙되고 민주적인 시야가 요망된다는 지적이 나왔다.
정부의 태도는 평화적인 정권교체가 과거 한국정치의 40년사에 있어서 단 한번도 없었던 일이니만큼 88년에 권좌에서 물러난다는 것은 「큰 정치」요 「큰 양보」라는 것이지만 정녕코 「큰정치」 「큰 양보」를 하려면 88년에는 수평적인 정권교체마저도 가능하게 하는 「좀 더 큰정치」까지 제시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있었다.
현재 한국사회에서 요구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정치를 활성화시키는 일, 정치를 제자리에 올려놓는 일이며, 그렇게 될때 국민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잠재력이 충분히 발휘되고 조국의 근대화 작업도 더욱 잘 추진될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사회는 빠른 속도로 변화하여 사회적 다원주의가 형성되고 있는데 이것이 정치적 다원주의로 연결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도 지적돼야 할 것이다. 특히 지나간 20여년간 한국의 사회경제는 빠른 속도로 변화한 결과 계급구조상 중산층도 크게 늘어났고 취업구조상 산업노동자의 절대수도 크게 늘어났다. 거기에 교육수준의 향상, 소득수준의 향상, 대중매체 보급률의 확대, 그리고 한국사회의 국제화 등으로 하여 한국인의 정치의식 수준도 크게 향상했고, 그 결과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욕구를 표출할 능력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특히 산업노동자 대도시 서민층들의 표출된 욕구를 정책화시킬 정치적 메커니즘이 마련되어 있지 못하다. 다시말하면 노동자들에게는 노동3권이 제대로 보장되어있지 않고, 또 이념정당 혁신정당이 뿌리를 못 내리고 보수양당이 각기 체제문제나 가지고 경합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결과 경제가 성장은 하고 있으나 산업노동자와 대도시 서민층들은 응분의 혜택을 못받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토론에서는 한국정치의 어두운 면이 많이 언급되었는데 그렇다면 한국정치가 민생문제에서나 체제문제에 있어 이처럼 어두운 길을 걷고 있는 까닭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어야 한다. 왜 이웃 일본이나 또는 다른 선진 민주국가처럼 체제문제에서 벗어나서 관심을 민생쪽에 집중시킬수 없는가?

<성숙화를 가로막는 2개의 특수한 요인>
다시 말하면 한국정치의 「성숙화」를 저해하는 요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한국정치가 안고있는 특수성 때문인데 크게 두가지의 요인이 지적될수 있다. 하나는 한국의 역사적 전통적인 요인이다.
과거의 권위주의적 전통, 유교적 전통속에서 생성된 카리스마가 정치에 깊숙이 침투하여 한국사회를 획일주의, 권력제일주의, 정치제일주의로 이끌고 가고 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우리가 겪고있는 상황적인 이유로 국토의 분단, 동족상잔의 6·25전쟁, 남북한간의 군사적 대결, 북한의 대남침투 위협으로부터 한국을 지키려는 반공주의, 안보위주주의,질서위주주의등이 한국의 정치를 활성화 보다는 위축의 방향으로 몰아가고 있다는 점이다.그리고 바로 이러한 이유로 정치가 국민의 존경심을 유도해내지 못하고 있고 정치의 정통성을 약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한국정치는 앞으로도 계속 이상과 같이 장래가 밝지 못하다는 것인가. 반드시 그렇게만 볼 수는 없다고 믿는다.
과거에는 그래왔으나 앞으로는 달라질 것이라고 보게하는 4가지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첫째는 우리사회의 변화가 정치의 획일성을 줄일 것이며 대신 정치의 다양성을 확대시켜 나갈 것이라는 점이다.
가장 단적인 예는 한국인의 「세대의 변화」다. 현재 한국인중 「6·25 이전세대」 는 30%정도에 불과하고 나머지 70%는 「6·25 이후세대」다.
전자는 물론 일제의 식민통치, 2차대전, 6·25전쟁 등을 몸소 체험한 세대이며 거기에 찌든 경제생활 춘궁기 따위도 몸소 겪어본 세대이기 때문에 욕구체계 자체가 안보 질서 경제지향적이라고 할수있다. 후자는 전자와는 전혀 다른 욕구체계를 가지고 있다.
구세대와는 달리 전쟁 한번 겪어보지 못한 세대이며, 특히 20대 30대는 생활수준이 비교적 풍요로운 시대에 성장함으로써 추구하는 가치 욕구체계가 정치적 자유·경제적 평등·인권존중등 비교적 고차원적이다. 이러한 사실은 85년2월12일 실시되었던 12대 국회의원 선거때 단적으로 나타났다. 한국정치는 한국사회의 이러한 변화와 추세를 결국 막을수 없을 것이다.
둘째는 북한사회도 남한사회와 같이 바뀌고 있다는 점이다. 이미 언급한 바와같이 북한은 남한으로 하여금 반공주의 안보제일주의 질서제일주의의 가치를 추구하게 함으로써 남한정치의 민주화 성숙화에 가장 근본적인 저해요인으로 작용해왔다. 그러나 폐쇄된 사회이고 변화가 느린 사회이지만, 그래도 북한사회 역시 변하고 있다.
북한에도 이제는 유일사상 미제국주의와의 투쟁등의 구호를 외쳐대는 빨치산 세대의 비중은 점차 줄어들고, 대신 6·25전쟁을 겪지않은 세대, 구세대에 비해서 비교적 물질적으로 나은 생활경험을 해 본 새세대의 비중이 늘어남으로써 대화지향적이고 개방적인 방향으로 갈 공산이 크다.
또 최근 북한은 전략상 소련과 밀착하고 있는 듯하지만, 체질상 중공과의 우의관계를 저버릴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등장할 김정일 체제는 자기의 정치생명의 유지를 위해서도 이상과 같은 변화에 대응하게 될것이다.
그리고 북한 사회내의 이같은 변화는 우리정치의 민주화 성숙화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수 있다고 본다.
세번째는 혁신정치 이념정치의 확대론으로 일종의 당위론이다. 전술한바와 같이 한국 사회경제는 빠른 속도로 변화하여 산업노동자 도시 서민층의 절대수가 계속 늘고 있으며 또 이들의 정치의식도 향상돼 자기들의 욕구를 표출할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추세는 앞으로도 계속 확대돼 결국에는 노동3권의 보장, 혁신정당 이념정당의 출현을 요청하게 될 것이다.

<상대입장 내것같이 생각하는 능력 필요>
그러나 한국에서는 일반국민이나 엘리트나 아직 이 정도의 정치적 개방을 허용하지 않고있는 실정이다. 이유는 분단이다. 한국에서는 혁신정당 이념정당을 계급정당 북한의 노동당과 대차없는 정당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사회민주주의의 기치를 내걸 혁신정당 이념정당이 뿌리를 내리는데에는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그렇다면 한국의 산업노동자 도시 서민층의 이익은 누가 대변할 것인가.
서독의 기민당, 또는 1955년 이후 현재까지 장기집권하고 있는 일본의 자민당이 우파의 정당이지만 좌파의 정책도 그때그때 필요하면 받아들여 실천한 예를 한국의 민정당 신민당등 우파정당들도 귀담아 들어야 한다.
마지막 네번째는 한국정치인 개개인에게 주는 당위론이다. 한국 정치인은 「감정이입」 (empathy)과 「자정」(self-purification)을 할 줄 알아야 한다는 점이다.
감정이입이란 여당인과 야당인사이, 노와 사사이, 지도자와 추종자 사이, 친구와 친구 사이, 상대방의 이해관계를 마치 내 것처럼, 상대방의 입장을 마치 나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는 능력을 키우자는 것이다. 자정이란 한국의 조직운영에 있어서 합리성 능률성이 뒷전으로 밀리고 서울대 출신이다 육사출신이다 따위의 학연, 영남이다 호남이다 따위의 지연, 김씨파다 이씨파다 따위의 혈연등의 요인이 지나치게 작용하고 있는데 특히 한국의 정치엘리트는 이런 경향에서 벗어나자는 것이다.
한국의 소득수준은 이제 2천달러의 시대가 왔다. 이것은 멀지않아 3천달러 5천달러로 올라간다. 한국의 정치도 이젠 「성숙한 정치」로 탈바꿈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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