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리우는 가게 됐지만…상처뿐인 올림픽 출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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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핑 파문으로 리우 올림픽 출전이 좌절된 러시아 육상 선수들이 큰 충격에 빠졌다. 세계반도핑기구(WADA)의 발표 사흘 뒤인 지난 21일 러시아 모스크바 외곽의 주콥스키에서 열린 러시안컵 육상대회에서 여자 높이뛰기의 마리야 쿠치나(왼쪽)와 나탈리아 아크쇼노바가 실망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주콥스키 AP=뉴시스]

육상과 역도를 제외한 러시아 선수단이 우여곡절 끝에 리우 올림픽에 출전한다. 그러나 러시아는 도핑(금지약물 복용) 파문으로 인해 국가 이미지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IOC, 대표팀 전체 출전 금지 안해
“러 선수 출전, 각 경기단체서 판단”
육상·역도 제외 대부분 참가할 듯
“러 장애인 선수도 약물 복용”
‘국가적 도핑’ 폭로 계속 이어져
스포츠 강국 이미지 치명상 입어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24일 화상 집행위원회를 열어 러시아 선수단의 리우 올림픽 출전 여부를 심의한 뒤 “각 종목 경기단체(연맹)의 판단에 따라 러시아 선수들의 올림픽 참가를 허가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미 올림픽 출전 금지가 내려진 육상·역도를 제외한 나머지 종목 314명의 올림픽 참가 결정을 각 종목 연맹에 떠넘긴 것이다. 다른 종목은 육상·역도에 비해 금지약물 복용 증거가 많지 않다. 게다가 연맹의 힘으로 러시아의 올림픽 출전을 막기는 어려워 IOC의 이번 결정은 사실상 ‘러시아 선수들의 올림픽 참가’로 해석할 수 있다. 알렉산드르 주코프 러시아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은 “우리는 리우로 간다”며 기뻐했다.

전 종목 올림픽 불참 사태를 피하기는 했지만 러시아 스포츠는 역사상 최대 위기를 맞았다. 지난 18일 세계반도핑기구(WADA)가 러시아 선수단이 조직적으로 도핑을 했던 사실을 밝힌 데 이어 21일 국제스포츠중재재판소(CAS)는 러시아 육상의 리우 올림픽 출전금지 철회 안건을 기각했다. 23일에는 러시아 장애인 선수도 약물을 복용한 사실까지 밝혀져 충격을 줬다. 필리프 크라벤 국제장애인올림픽위원회(IPC) 위원장은 이날 “러시아가 장애인 선수들에게도 약물을 투여했다. 이와 관련한 19개의 소변 샘플을 확보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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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각에서는 장기간에 걸쳐 조직적으로 금지약물을 복용한 러시아 선수들의 올림픽 출전을 모두 막아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그러나 IOC로서는 올림픽 개막을 불과 11일 남긴 시점에서 그런 결정을 하기가 부담스러웠던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 도핑 파문은 여전히 불씨가 살아 있다. IOC는 지난 19일 집행위원회에서 러시아의 국제대회 개최 및 후원금지 등의 징계를 결정했다. 21일에는 20여 개 경기단체 및 선수위원회 수장들이 “2018년 평창 겨울올림픽에서 러시아의 출전을 막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1968년 멕시코시티 대회부터 2008년 베이징 대회까지 총 11차례의 올림픽 도핑 테스트에서 적발된 러시아 선수는 7명뿐이었다. 도핑 의혹이 끊이질 않았지만 증거가 불충분해 제대로 잡아내지 못했다.

러시아의 치부는 내부 고발자의 폭로로 드러났다. 2014년 12월 독일 방송사 ARD는 ‘비밀 도핑 보고서-러시아는 어떻게 우승자를 배출했나’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통해 ‘러시아 올림픽 대표선수의 99%가 금지약물을 복용하고 있다’는 충격적인 내용을 전했다.

여자 육상 800m 국가대표 율리아 스테파노바(30)의 남편인 비탈리 스테파노프는 “러시아에서는 도핑을 하지 않고는 목표를 이룰 수 없다. 코치들은 ‘메달을 따고 싶다면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하곤 했다. 그 도움은 바로 도핑”이라고 폭로했다. 스테파노바도 “코치가 ‘불시 점검에 대비해 깨끗한 소변 샘플을 항상 냉장고에 보관해 두라’고 주문했다”고 말했다. 보도 이후 WADA는 조사위원회를 구성해 조사에 착수했다.

국제육상경기연맹(IAAF)은 지난해 8월 “2001년부터 2012년까지 열린 올림픽과 세계선수권에서 러시아가 딴 메달의 80%를 도핑 의심 선수가 차지했다. 러시아는 세계 도핑의 진원지”라고 결론 내렸다. 지난 5월엔 그레고리 로드첸코프 전 모스크바 실험실 소장이 “도핑에 연루된 러시아 선수들이 소치 겨울올림픽에서 15개 이상의 메달을 땄다”고 주장했다. WADA가 지난 4월 발표한 도핑선수 실태조사에서도 러시아 선수 148명이 적발됐다. 리처드 파운드 WADA 독립위원회 위원장은 “러시아의 도핑은 소련의 잔재”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도핑 책임을 회피해 왔다. 비탈리 뭇코 러시아 체육부 장관은 “메달을 수여한 이후엔 도핑 문제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10년 동안 소변 샘플을 보존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했다가 물의를 빚었다. IOC가 올림픽 출전 금지를 논의하자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최근에야 도핑방지위원회를 구성했다.

김지한 기자 kim.jih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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