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00> 제84화 올림픽 반세기 <49> 김성집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천신만고 끝에 유치한 70년 아시안게임을 자진 반납해야 했던 것은 한국 스포츠사의 부끄러운 한 사건이었다.
방콕 아시안게임 폐회식장 대형 전광판 위에 씌어진 「70년 서울에서 다시 만납시다」라는 글씨가 안겨줬던 가슴 뿌듯한 감동은 6개월이 못 가 실망과 좌절로 바뀌고 말았다.
제6회 아시안게임의 서울유치 결의는 66년3월28일 KOC 정기위원 총회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당시 위원장이었던 이상백 박사가 4월14일 심근경색증으로 급서 함에 따라 유치작업의 바통은 새로 KOC 위원장에 선출된 장기영씨에게 넘겨졌다.
60년부터 추진되어온 아시안게임 유치는 체육인 모두의 꿈이었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우여곡절을 겪어야했다.
장기영 위원장은 6월18일 취임기자회견에서 『대회 유치는 국민의 절대적인 여망이다. 우리의 분수에 맞도록 대회를 운영하겠다』고 밝힘으로써 유치문제는 급속도로 진전을 보였으며 이어 김현옥 서울시장의 유치 메시지 발송으로 본격화됐다.
정월터·손기정 이생구·조동재·유태영씨 등 유치사절단은 2진으로 나뉘어 아시아 각국을 순방하며 유치공작을 벌였다.
그러나 이 유치계획은 대한체육회와 충분한 협의 없이 KOC 중심으로만 추진되어 다수의 체육인들이 『우리는 바지저고리란 말이냐』며 반발을 나타냈고 정치 경제적인 사정까지 복잡해져서 벽에 부닥치고 말았다.
국무회의는 『예상 소요경비 60억은 2차5개년 계획에 지장을 준다』 는 이유를 들어 유치포기를 선언했으나 l2월3일 정일권 국무총리는 『7억5천만 원으로 대회를 치를 수 있다』 는 K0C의 약속을 받고 다시 포기선언을 번복했다. 체육인들은 어느 장단에 춤을 추어야할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방콕 아시안게임 기간중인 12월15일에 열린 AGF 평의원 총회는 7O년 대회의 서울유치를 만장일치로 결의했다.
지금도 부끄러운 일은 체육인들의 뜻이 한데 모아지지 않고 쌍두 마차와도 같은 두 단체의 갈등이 이런저런 잡음만 무성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반목이 아니었다면 국제적인 망신도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결국 이듬해 6월 박정희 대통령의 대회개최 포기지시가 떨어졌다. 이유는 재정적인 부담이 크다는 것이었다.
체육계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손상된 국가위신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개최권을 넘겨줄 국가도 마땅치 않았다.
장기영 KOC 위원장과 민관식 체육회장 등 체육계 인사들은 일본을 방문, 대회를 인수해 주기를 요청했으나 72삿뽀로 동계올림픽,70년 오오사까 만국박람회 등으로 불가능하다는 답변이었다.
온갖 우여곡절 끝에 68년 멕시코에서의 아시아 경기연맹 총회에서 태국으로 대회를 넘기게됐다.
한국이 대회경비 25만 달러를 부담하고 아시아 9개국이 16만 달러를 분담하며 그 외에도 최대한의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약속이 뒤따랐던 것으로 기억된다.
국내 체육계는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서 체육단체 통합이라는 문제의 심각성을 통감했고 드디어 68년3월l일 KOC·대한체육회·학교체육회 등을 묶은 통합체육회가 탄생, 민관식씨가 회장에 취임했다.
멕시코 올림픽이 7개월여 앞으로 다가와 있을 때였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