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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성파 ‘성골’만 살아남는 폐쇄적 구조가 위기 자초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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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9호 6 면

한나라당(새누리당의 전신) 대선 후보 경선전이 한창이던 2007년 7월 24일 박근혜 후보 사무실에 당시의 캠프 핵심 관계자들이 모여 회의를 하고 있다. 왼쪽부터 (현직 기준으로)유정복 인천시장, 유승민·김무성·서청원 의원, 박 대통령, 김재원 청와대 정무수석, 최병렬 전 의원, 안병훈 전 조선일보 부사장, 홍사덕 전 의원, 이혜훈 의원이다. 박 대통령과의 관계가 멀어진 김무성·유승민·이혜훈 의원은 현재 비박계로 분류된다. [중앙포토]

새누리당의 친박근혜(친박)계가 최대 위기를 맞았다. 친박 핵심으로 꼽히는 새누리당 최경환·윤상현 의원과 현기환 전 청와대 정무수석의 녹취록 파문은 그들의 민낯을 또 한 번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친박계 내부의 거센 요구 속에 8·9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 출마를 고심하던 ‘맏형’ 서청원 의원도 결국 뜻을 접었다. 내년 대선을 친박계 지도부 체제로 치르고 싶은 그들의 희망사항도 자꾸만 스텝이 꼬여가고 있다. “친박계란 이름은 이제 주홍글씨가 돼버렸다”는 자조가 친박계 내부에서 나오고 있다. 기자들에게 “(한때 친박이었다가 결별한) 탈박(脫朴)이 아니라 아예 비박(非朴)으로 써줄 수 없느냐”고 부탁하는 의원도 생기고 있다. 폐족(廢族)을 선언했던 친노무현계, 공천학살로 와해된 친이명박계의 전철을 친박도 걸을 것인가. 그들의 미래를 알기 위해 현재의 친박을 들여다봤다.

“간신 설치면 충신 입 다문다” 문자 돌아 박근혜 정부에서 청와대 요직을 지낸 친박계 인사 A씨는 최근 또 다른 친박계 인사로부터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사악한 간신이 설치면 정직한 충신은 입을 다문다”는 중국 사서를 인용한 내용이었다. 최경환·윤상현 의원이 김성회 전 의원에게 ‘대통령의 뜻’이라며 출마 지역 변경을 권유한 전화통화 녹취록이 공개된 직후였다. A씨는 “말을 아끼고들 있지만 친박계 내부에서도 일부 핵심 친박의 행태에 분개하는 이가 적잖다”고 전했다. 그에게 친박계의 내부 사정을 물었다.


-대통령이 윤 의원에게 ‘오더’를 내렸을까. “내가 모신 박 대통령은 ‘서청원 의원을 대표로 출마시키라’거나 ‘지역구를 조정하라’는 식의 지시를 내리는 분이 절대 아니다. 지나가는 말로 한마디 하면 주변에서 뻥튀기해 ‘대통령의 뜻’으로 포장해 자기 위주로 떠들고 다니는 거다. 정말로 대통령이 윤 의원에게 그런 오더를 내렸다면 윤 의원은 아마 칼을 들고 (김 전 의원에게) 찾아갔을 것이다.”


-그런 사례를 꼽자면. “지난해 홍문종 의원의 (이원집정부제) 개헌 발언, 4·13 총선 전 조원진 의원이 대구에 내려가 ‘박 대통령이 선물 보따리를 준비하고 있다’고 한 발언, 이한구 전 공천관리위원장이 주호영 의원을 공천 탈락시킨 것 등이다. 다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해놓고 대통령의 뜻인 양 뉘앙스를 풍겼다.”


-왜 이런 일들이 반복되나. “박 대통령이 소통이 안 되는 건 사실이다. 2인자도 만들지 않는다. 그렇다 보니 대통령을 팔아 호가호위하는 사람들이 생기는데 바깥에선 진짜 친박 핵심처럼 여겨진다. 그런데 박 대통령이 그걸 보고 특별히 나무라거나 내치지 않으니 그런 일이 되풀이된다.”


-그렇더라도 대통령을 판다는 게 쉽게 이해되진 않는다. “박 대통령은 대선 과정에서 누구에게도 빚을 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본인 능력으로 당선됐다고 생각한다. 그렇다 보니 이명박 전 대통령처럼 참모들에게 자리(고위직)를 만들어주거나 하지도 않는다. 실질적 보상이 없으니 대통령을 팔아 자신의 지위를 보상받으려는 심리가 있는 것 같다.”


심리학자와 정치학자에게 친박계의 추락 원인을 물었다. 심리학자인 황상민(전 연세대 교수) 박사는 “박 대통령이라는 보스 주위에 모여있다는 것 외에는 구성원 간에 어떤 공통적 성격도 발견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 두각을 나타내기 위해선 제각각 보스와 가깝다고 주장하며 호가호위하는 경향이 강해지게 된다”고 설명했다. 정치학자인 김형준 명지대 교양학부 교수는 “대통령과의 친소 관계만이 친박계의 운영 원리이기 때문에 호가호위가 성행할 수밖에 없다”며 “지금은 소수의 ‘성골 친박’이 공천권과 당직 등 정치적 자원을 독점하고 있어 그들과 다른 범친박 간의 분화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다른 정파와 비교할 때 친박계는 외부와의 소통 부족과 폐쇄성이 약점으로 자주 지적된다. 새누리당 강남권의 한 비박계 의원은 “‘민중은 개·돼지’ 발언으로 파면된 나향욱 전 교육부 정책기획관 문제가 불거지자 많은 친박계 의원들은 ‘그러게 왜 기자들하고 밥을 먹느냐’고 반응하더라”고 말했다. 조윤선 전 청와대 정무수석이 지난해 5월 기자들에게 “공무원연금 개혁안에 여야가 합의했다”고 말했다가 결국 수석직 사퇴로 이어진 것이 ‘자신의 의견을 함부로 얘기했다간 잘리게 된다’는 폐쇄적 인식을 친박계에 각인시켰다는 분석도 있다.


가치 중심 친이계, 인물 중심 친박계 사람을 키우지 않는 문화가 친박계를 점점 더 위축시킨다는 의견도 있다. 민간 정치 싱크탱크 ‘더모아’의 윤태곤 정치분석실장은 “김영삼 전 대통령은 상도동계 소속이던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가 ‘박근혜 밑으로 가겠다’고 하자 놓아줬다. 또 노무현 전 대통령은 비서이던 안희정·이광재를 도지사로 키우며 ?자기 정치?를 하게 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성향상 김무성·유승민처럼 자기 정치를 하려는 이는 휘하에 두려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렇다 보니 친박계엔 충성심이 아주 강하거나 자신의 정치를 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만 남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친박계는 과거 친이계와 비교되기도 한다. 익명을 요구한 당내 인사는 “친이계는 정두언·박형준 등 개혁 성향의 당내 쇄신파가 MB(이명박)를 통해 자신들의 가치를 실현하려는 ‘기브 앤드 테이크’ 관계였다. 반면 친박계는 가치보다는 인물(박 대통령) 중심 구조이다 보니 수직적이고 충성심을 중시하며 폐쇄적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4·13 총선 패배 후 청와대와 친박계 책임론이 강하게 제기되며 친박의 분화는 본격화됐다. 이해관계에 따라 사분오열하며 대오는 헝클어지고 있다. 지난 5월 원내대표 경선 때 친박 핵심 중 한 명으로 꼽혀 온 유기준 의원이 최경환 의원으로부터 출마를 만류받자 “바로 오늘부터 당장 친박 후보라는 지칭을 하지 말아달라”며 출마를 강행했다. 경선에서 친박계의 지지를 받아 당선된 정진석 원내대표는 이후 “친박에 빚진 것이 없다”며 독자 노선을 걷고 있다. 지난달 새누리당 비상대책위가 유승민 등 탈당 의원 복당을 기습 결의했을 때 친박 강경파가 강력히 반발했지만 서청원 의원은 “비대위 결정을 따라야 한다”며 다른 목소리를 냈다. 또 대구·경북에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를 배치하려 하자 ‘진박’(진실한 친박)을 자처하던 이 지역 의원들이 목청 높여 반정부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전대 국면에서 친박의 분화는 더욱 심화되는 분위기다. 범친박계 후보로 통했던 이주영·한선교 의원은 사실상 ‘탈박’ 행보를 보이고 있다. “(총선에서) 책임 있는 인사들이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이주영), “호가호위하는 그분들(친박)이 대통령을 팔아 장사한 경우가 많다”(한선교) 등 강성 발언을 쏟아내고 있다.


친박의 미래에 대해 김형준 교수는 “계파는 한국 정치의 오랜 특성이며 권력 상실에 따라 예외 없이 분화-소멸의 길을 걸었다. 상도동계는 1997년 대선을 앞두고 이수성계·최형우계·김덕룡계 등으로 쪼개졌고 동교동계도 친노와 비노로 나눠졌다”고 했다. 친박의 분화나 결과적인 와해를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보는 견해다.


이밖에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대선후보 영입으로 친박계가 다시 정치의 중심에 서려 할 것이라는 시나리오도 있다. 하지만 윤태곤 실장은 “친박은 대중적 인기가 없고 매력적인 인물이 없다. 반 총장이 친박 핵심 인사들을 선거대책본부장 등 캠프 요직에 앉히고 싶어 하겠나. 중용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며 부정적으로 내다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박이 일정한 정도의 세력을 유지하리란 관측이 작지 않은 건 대구·경북(TK)과 충청권 중심의 지역 기반 때문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TK)과 육영수 여사(충청)의 고향에선 박 대통령이 퇴임 후에도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할 가능성이 크고 지역구 지지 확보를 위해 박 대통령의 정치적 후견이 필요한 곳에선 친박 세력이 유지되리라는 분석이다.   홍문종 출마 땐 친박계 표 분산 가속 서청원 의원의 불출마로 시선은 친박 4선 홍문종 의원의 당 대표 출마 여부로 쏠리고 있다. 홍 의원이 나설 경우 ‘친박계지만 계파 색채를 탈피하려는’ 이주영·한선교·이정현 의원에 비해 친박 후보로서의 정체성은 명확해질 것으로 보인다. 홍 의원의 마음도 출마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하지만 그의 출마는 친박계 표심을 더 분산시킬 수밖에 없다. 서청원 의원이 주재하는 27일 친박계 만찬 회동에서 친박계 후보들에 대한 최종적인 교통정리가 시도될 가능성이 크다. 친박계의 표 결집 양상에 따라 정병국·주호영·김용태 등 비박계 후보 간 단일화 움직임도 탄력을 받게 된다.


현재로선 홍 의원이 출마하지 않는다면 이주영 의원에게 친박 표가 몰릴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대체적인 분석이다. 비박계 일부도 계파 색채가 비교적 약한 이 의원을 지지하고 있다. 친박과 비박 모두 단일화 또는 표를 결집해 사실상의 일대일 구도가 성립할 경우 박 대통령 지지자가 많은 새누리당 당원 구조상 친박계 후보에게 유리할 전망이다. 하지만 “우병우 민정수석에 대한 비판과 계파 청산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지금을 ‘탈박’의 적기로 보는 이가 많아 예측 불허의 싸움이 될 것”이라는 반론도 있다.


이충형 기자 adch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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