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축성장이 낳은 압축갈등, 계층 상승의 사다리 복원 시급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489호 12면

신인섭 기자

지난 5월 유승민 새누리당 의원이 성균관대 특강에서 한 보고서의 내용을 인용해 한국 사회를 “폭발 일보 직전의 초갈등 사회”라고 표현했다. 그가 인용한 건 국민대통합위원회가 지난해 말 완성한 ‘한국형 사회갈등 실태진단’ 보고서다. ‘경제력에 따른 계층 간 갈등이 어떤 식으로든 적절하게 통제되지 않으면 한국 사회를 무너뜨릴 수 있는 수준까지 나아갈 것’이란 게 보고서의 결론이다. 한광옥(사진) 국민대통합위원회 위원장을 만나 그가 보는 한국 사회 갈등의 원인과 해법을 들어봤다. 2013년 처음 위원장직을 맡은 뒤 계속 연임된 그는 지난 15일 네 번째 임기(1년)를 시작했다.


-보고서 내용이 화제를 낳고 있다. 어떤 내용인가. “국민통합 정책 수립을 위해 김문조 고려대 명예교수팀이 다양한 국민 100여 명을 심층인터뷰한 결과로 만든 보고서다. 국민 의견을 가감도, 축소도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전달하려 노력했다. 취지는 국민이 일상에서 어떤 갈등을 느끼는지 알아보자는 거였다. 인터뷰 결과 경제 수준과 상관없이 국민의 좌절감이 생각보다 컸다. 조사팀은 심층인터뷰에서 강박·고투(孤鬪)·탈진·포기·단절·원한·반감·단죄 등 8개의 키워드를 뽑아냈다. 8개 키워드를 분석했더니 결국 경제력 차이나 빈부 격차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파악했다. ”


-조사팀의 진단은 뭐였나. “불안·경쟁·피로 등 한국 사회에 축적된 갈등이 포기와 단절·원한·반감 등 극단으로 치닫고 있으며, 따라서 경제력에 따른 계층 간 갈등이 적절하게 통제되지 않으면 한국 사회를 무너뜨릴 수 있는 수준까지 나아갈 수 있다는 경고였다.”


-계층 간 갈등이 그 정도로 심각한가. “한국은 압축성장을 이뤘지만 그 대가로 압축갈등을 겪고 있다. 부모의 부가 그대로 세습되는 ‘금수저’가 많아지면 사회가 위험해질 수 있다. 분노사회가 될 조짐이 있다.”


-어떻게 해결할 수 있나. “결국 일자리 문제다. 좋은 일자리가 많아져야 한다. 그런데 저성장 국면으로 접어들면서 좋은 일자리를 많이 늘리기 힘들다. 그래서 반일제 노동 등 일자리 나누기가 필요하다고 본다. 그리고 계층 상승의 사다리를 복원하고 패자부활전을 늘려야 한다. 복지도 중요하지만 교육이 해법이다. 4차 산업혁명으로 기존 일자리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더 그렇다. 교육에선 금수저도 흙수저도 모두 같은 선상에 있어야 한다.”


-인성교육도 해법으로 제시됐는데. “조사팀이 제시한 처방 중 하나다. 사회 갈등을 경제적으로만 푸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뜻이다. 강남의 돈 많은 집 사모님도 인터뷰 해 보니 의외로 사회에 대한 불만이 많았다. 의식이나 문화도 바꿔야 한다. 사회가 너무 이기적이고 팍팍해졌다. 공동체 의식을 높이고 다른 계층과 소통하는 교육도 필요하다.”


-갈등 자체가 문제가 되나. 어느 사회에나 있지 않나. “갈등 자체는 나쁜 게 아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잘살고 싶다’ ‘성공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서로 경쟁을 한다. 경쟁을 하면 갈등이 생긴다. 이런 갈등은 생산적 갈등이다. 사회 발전의 동인이 된다. 그러나 생산적이지 않고 발전적이지 않은 갈등이 문제다. 우리 사회엔 분열적이고 파괴적인 갈등이 꽤 있다. 계층·지역·세대·이념·노사로 갈려 생긴 갈등이다. 삼성경제연구원은 2010년 기준으로 한국 사회가 이 같은 갈등 때문에 연간 82조~246조원의 경제적 비용을 소모한다고 추정했다. 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7개국 가운데 종교 분쟁을 겪고 있는 터키에 이어 두 번째로 사회갈등 지수가 심각하다.”


-네 번째 임기를 시작했는데 지난 3년간 어떤 일을 했나. “정부·지방자치단체·시민단체와 함께 대통합 로드맵을 세웠다. 전국을 돌며 국민대토론회를 열었고 ‘남을 배려하자’ 등 생활 속에서 사소하지만 소중한 일을 하자는 ‘작은 실천, 큰 보람’ 운동을 시작했다. 또 사회 구석구석에서 말없이 훌륭한 일을 하는 사람들을 찾아내 ‘생활 속 영웅’으로 표창했다.”


-지방을 돌며 느낀 건 뭔가. “가장 큰 불만은 균형발전이다. 지방에선 청년도, 노인도 일자리가 없어 아우성이다. 서울과 수도권이 독식했기 때문이다. ‘다 같은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라 서울국민이 있고 지방국민이 따로 있다’는 소리도 들었다. 중앙정부에서 지자체에 위임 사항은 많이 내려 보내는데 예산을 충분히 뒷받침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충분한 예산을 확보해야 한다. 그러려면 시간이 많이 걸린다. 또 하나, 요즘 귀농하려는 사람이 많은데 선뜻 결단을 못하는 건 지방에 내려가면 문화 욕구를 충족시키기 어렵기 때문이다. 귀농을 활성화하려면 지방의 극장과 학교에 더 과감하게 투자하면 된다.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이 지방에 많아지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게 균형발전의 기반이다. 지방과 소통만 잘해도 지방의 불만이 절반은 풀어진다. 소통이 원활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해도 하고 서운함도 느끼고 있다.”


-국민통합은 무엇인가. “그런 질문을 많이 받는다. 뜬구름 잡는 얘기일 수 있다. 한마디로 오케스트라다. 서로 다른 악기에서 다양한 소리를 내지만 아름다운 화음을 이루지 않나. 통합은 강제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지금처럼 다원화·다양화된 사회에서 더 힘들다. ‘해불양수’(海不讓水)라는 말이 있다. ‘바다는 어떠한 물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짠물, 민물, 더운물, 찬물, 깨끗한 물, 더러운 물이 다 바다로 흘러가는데 다 받아들여진다. 그래도 바다의 정체성이라는 짠맛은 잃지 않는다. 그 말을 너무 좋아한다. 국민통합도 마찬가지다.”


-국민통합에서 바다의 짠맛과 같은 정체성은 뭔가. “‘다 같이 어우러져 잘살자’는 공동체 가치다. 이 가치가 없다면 국민통합은 물론 한국이란 사회 자체가 존립할 수 없게 된다. 미국의 생물학자 개릿 하딩은 ‘모두에게 개방된 목초지가 있다면 목동들이 자신의 사유지는 놔두고 공유 목초지에만 소를 방목해 곧 황폐해진다’는 ‘공유지의 비극’을 설명했다. 공동체 가치만이 공유지의 비극을 막는다.”


이철재 기자 seajay@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