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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의 고향<154>(글 사진 문병호기자)|광주 김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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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광주 김씨의 시조 김녹광은 신라 마지막 임금 경순왕의 다섯째 아들 김석의 7세손으로 전한다.
고려중엽 몽고의 침입 때 상장군으로 몽고군을 쳐부순 공으로 광주군에 봉해져 광주를 본관으로 가문을 열었다.
서기 1236년 고려 고종임금 때.
이후 7백50여년, 남한에만 1만2천여 가구의 벌족을 이루었다. 북한에도 1930년 조사로 7백여 가구가 분포한 것으로 나타나 현재는 적어도 1천여 가구가 살 것으로 추산된다.
광주 김씨가 융성을 누리기는 고려조.
녹광의 아들 굉은 감찰어사를 지냈고 그 아들 항은 문하중서시랑평장사의 높은 벼슬에 올라 가문을 명문의 위치에 올려놓았다.

<3천의 의병을 편성>
특히 항은 원에 사신으로가 원나라 조정의 힘을 빌어 고려 원종 임금을 바꿔 세우려는 임연 일파의 음모를 저지, 나라의 체모를 살렸다. 뒷날 삼별초의 난에는 금주 (현 김해) 방어사로 기용됐고 충렬왕 때 예문관대제학·보문각 태학사·문하찬성사를 거쳐 문하시랑평장사(정2품)에 이르렀다. 청백리로 명망이 높았고 학문과 문장이 뛰어났으며 글씨도 잘 써 당대의 명필 군인으로 꼽혔다.
그는 남물과 개물 두 아들을 두었다.
남물의 아들 인간은 벼슬길을 마다하고 학문에 뜻을 세워 성리학의 보급에 앞장섰다. 곤수(찰방)·차문(공조참의)·경보(상주목사)·대근(강릉부사)·여(장예원 판결사)가 대를 이었다.
그러나 광주 김씨의 이름을 역사에 가장 크게 기록한 인물은 임진란의 용장 김태허장군.
여의 아들인 태허는 옥포만호로 있다가 왜군이 부산에 상륙, 울산을 공격해 올 때 울산에 머무르고 있었다.
태평연월의 꿈을 침략대군에 기습당한 조선은 풍지박산의 형세였다. 벼슬아치도 군인도 목숨을 아껴 도망치기에 바빴고 소수의 기개있는 관리·군인·시민들만 나라에 목숨을 던졌으나 희생일 뿐이었다.
울산의 군수도 왜군 침노의 급보에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의지를 잃은 백성은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댈 뿐이었다. 그때 태허는 분연히 일어나 성을 접수하고 임시 군수가 됐다. 흩어진 백성들을 모아 3천의 시민군을 편성하고 동래·양산·기장등을 오가며 왜군과 전투를 벌였다. 병건 박진의 장계로 장군의 의용을 알게된 조정은 그를 울산군수로 정식 임명, 성을 지키게 했다.
그러나 왜군의 대규모 공격에 성을 오래 지킬 수 없게되자 근거를 옮겨 경주·장기등 서부경북일대에서 유격전을 전개하다 곽재우군과 화왕산상서 합류, 전쟁이 끝날 때까지 역전의 무공을 세웠다.
그공으로 난이 평정된 뒤 지중추부사겸 오위도총관 호위대장이 되고 선무원 종1등 공신에 책록 됐으며 돌아가자 양무공의 시호가 내려졌다.
그 아들 수겸도 아버지를 따라 종군, 절충장군의 벼슬과 2등 공신의 책록을 받았다.
차문의 고손 기도 임난에 의병을 일으켜 동래성전투에 참가, 부사 송상현과 함께 순절해 어모강군에 추증되고 부산 충렬사에 배향됐다.

<양무공의 시호 내려>
김우정은 임진왜란서 왜군의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와 『간양록』을 저술한 유학자 강항과 함께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던 기구한 운명의 주인공. 강항과 함께 고국에 돌아와 향리서 유학의 연구와 후진양성으로 일생을 마쳤다.
돌아간 뒤 고향선비들이 향경재를 세워 그 유덕을 기렸다.
여의 손자로 김태허 장군과 사촌간인 김태을은 숨은 선비로 임난 후 천거돼 벼슬을 제수 받았으나 취임한날 사임하고 돌아와 학문으로 일생을 마쳤다. 영남유학의 중진으로 꼽혔다.
아들 수인이 그 학문을 이었다. 수인은 광해군이 어머니 인목대비를 폐하고 아우 영창대군을 죽이는 패륜을 저지를 때 성균관에 학생으로 있다가 혼자서 7일 동안 매일 궁궐앞에 나가 그 부당함을 고치라는 상소를 했으나 응답이 없자 『명륜당상미명륜부고귀가노차신 (인륜을 밝힌다는 명륜당에도 인륜은 밝아지지 않네, 차라리 집에 돌아가 남은 삶을 보내리)
…』 하는 시를 지어 남기고 요즘의 서울대 격인 성균관을 박차고 낙향해버린 기개 있는 선비.

<성균관박차고 낙향>
이 같은 기개는 또 한말 많은 항일투사의 배출로 나타나 김진성·김석창·김상윤·김규환·김승문·김영복등이 정부수립 후 건국공로훈장·표창을 받았다.
김진성은 만주서 독립군 군자금모금활동을 하다 체포돼 8년6개월 징역을 살았고 김석창은부천경찰서를 폭파하려다 검거돼 8년형을 살았으며 김상윤은 의열단, 김규환은 대동청년당, 김승문은 대한독립지원단, 김영복은 대구사범사건등에 참여, 모두 옥고를 치른 투사들.
해방 후엔 김수선씨가 제헌 및 4대 국회의원에 뽑혔고 김정환씨가 역시 4대의원을 역임했다. 숭전대총장을 역임한 김형남박사 (신학·의학)와 불국사·통도사주지를 역임하며 고승으로 꼽힌 김경봉스님, 전 동아일보 발행인 김승문씨도 광주 김씨. 군에 김선일·김성배 예비역준장이 있으며 김태영 교수(경희대), 김창호 (숭전대이사장), 김영호 (일신방직대표), 김홍기(대한신약대표)씨등이 교육·실업계에서 활약하고 있다.
지명인사

<종친회제공·무순>
▲김수선 (제헌 및 4대의원) ▲김정환 (4대의원) ▲김형남 (전숭전대학총장·신박· 의박) ▲김경봉(전 표충사·통도사·불국사주지) ▲김승문 (전 동아일보 발행인) ▲김원모 (종친회명예회장) ▲김상립 (종친회장·성균관전학) ▲김선익 (예비역준장) ▲김성배 (예비역준장·어린이회관장) ▲김세종(미국국제대학설립자겸총장·문박) ▲김용특(신도실업주대표) ▲김태영(경희대교수·문박) ▲김영록 (축협중앙회이사) ▲김상대(치안국총경) ▲김국보(단군정신선양회이사장) ▲김창호(숭전대학재단이사장) ▲김덕윤(동일목재(주)대표) ▲김수봉 (독립운동가·한의원장)▲김덕보 (재경종친회장) ▲김인권(재경종친회부회장) ▲김영호 (일신방직(주)대표이사) ▲김홍기(대한신약대표이사) ▲김병호(예비역대령·종친회부회장) ▲김무룡(예비역대령) ▲김기환(부산북부세관장) ▲김윤찬(대한기독교연합회장·신박) ▲김규완(소아과병원장·의박) ▲김성철(보금장대표·재경종친회부회장) ▲김지명(영지물산회장) ▲김명식((주)삼환까무대표) ▲김을영(대양물산대표) ▲김영환 (어문각대표이사) ▲김우상 (외무부참사관) ▲김례양(전 농촌진흥원장) ▲ 김상진 (동명중상교 교장) ▲김인호 (전동아일보 광고국장) ▲김경운 (전재구종친회장) ▲김상중 (밀양수정록편찬부위원장) ▲김두영 (부산일보 지국장) ▲김성기(재부종친회장) ▲김판환 (재구종친회장) ▲김인정 (덕천명예군수) ▲김현보(발명가·한국·프랑스특허) ▲김영복 (전밀성중고교교감) ▲김석태(구세군사관학교 서울교구장) ▲김경남 (한국 동경전자감사) ▲김수영 (재부종친회부회장) ▲김상한 (부산대서무과장) ▲김종원 (신탁은행영업부장) ▲김춘 (단웅상사대표) ▲김용화 (금풍정밀대표이사) ▲김장량(부산수산대교수) ▲김기우(부산대교수) ▲김상호(동아대교수) ▲김석환 (동아대교수) ▲김재연(충렬사안악서원원장) ▲김영규(사업가) ▲김정도(재구종친회부회장)

<다음차례는 예천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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