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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감도」해설…이종희<명치대강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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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보기

종합 10면

이 그림을 본 순간 나는 몹시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제도시 부산의 3백50년 전의 모습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기 때문이다.

<일본식으로 표기>
이 조감도는 부산만을 중심으로 왼편 위쪽에는 황령산으로부터 장산봉에 이르는 산줄기를 그렸고 장산봉밖에 오륙도가 보인다. 주목되는 것은 산줄기의 묘사수법이 일본식이며 황령
산과 장산봉에 붙은 「화립처」 라는 표기도 봉화대 (봉수)를 의미하는 일본식표기라는 점이다.
부산만 오른쪽에 있는 것이 영도인데 남포동쪽으로 길게 뻗친 백사장에는 「에조강「기강)이라 쓴 종이조각이 붙어있다.
영도 위의 작은 섬은 생도. 생도 저쪽 구름같이 표시된 것은 대마도의 산들이다.
조감도 밑부분은 왼쪽에 구봉산줄기, 오른쪽에 천마산줄기를 그렸고 해수욕장으로 이름난 송도도 표기돼있다.
이 조감도의 가장 주목되는 곳은 부산만 왼쪽에 보이는 마을 모습이다. 오늘의 자성대주위에는 2중, 3중으로 된 성벽이 보이는데 이것은 임진왜란(1592∼98년)후 새로 축조된 부산진성이다. 정면에 있는 다리(교)건너편에 보이는 것이 부산진성의 서문이며, 바다쪽에 남문, 서문 왼쪽에 북문이 보인다.

<일본화가가 그려>
부산진성위에 「구산지성」이라고 쓴 종이조각이 붙어있는데 17세기이후 일본사람들은 부산진성을 이렇게 불렀었다.
이로써 이 조감도를 그린 것이 일본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그리는 수법도 일본식이다.
부산진성의 밑, 즉 성의 오른쪽에 방파제가 있고 그 왼쪽에 바다로 돌출한 작은 반도같은 것이 보인다. 이것이 영가대이며 그 안쪽이 17세기초부터 금세기 초까지 사용되었던 부산항이다. 축항은 1614년.
기록에 따르면 통신사 일행은 이곳 영가대에서 용신제를 지낸 뒤 일본으로 떠났었다. 1636년의 부사 김세렴은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사경에 영가대에 가서 제사지냈는데 제사지내는 예를 오례의의 해독제를 따랐다. 대는 부산진성 밖 포구에 있는데, 권공반이 방백이었을 때 항만을 파 배 감추는 데로 쌓아 높이가 수십길이다. 』

<부전동 일대는 밭>
이조감도에는 부산의 시가지가 부산진성과 영가대의 서쪽에 형성돼 있는데 그 범위는 오늘의 범천동 남쪽에서 정규장군의 사당인 정공단 부근까지다. 왼쪽의 부전동 일대는 밭이고 황령산 밑에 작은 마을이 보인다. 한편 장산봉 아래 적기부근에 큰 마을이 형성돼 있으나 초량동으로부터 용두산까지에는 인가가 없고 해안백사장으로 소나무가 이어있을 뿐이다. 그리고 남부 민동의 해안에 작은 마을이 보인다.
용두산밑 부산시청이 자리잡은 곳에 용미산이란 독립된 작은 산이 있었는데 금세기초에 그 산을 헐어 매림에 사용했었다. 조감도에는 그 용미산이 보이며 「요부기」라고 일본글로 된 종이조각이 붙어있다. 일본사람들은 이곳을「요부사끼」라고 불렀던 것이다.

<두미포 왜관 선명>
이 조감도가 주목되는 또 하나의 이유는 두모포 왜관이 그려져 있는 사실이다. 영가대 오른쪽에 건물들 주위를 돌담으로 두른 곳이 있고 「왜관」 이라고 쓴 종이가 붙어있는 곳이 바로 그곳이다.
두모포 왜관은 임진왜란후 일본과 국교가 회복 (1607년)되고 무역협정인 기유약조를 맺음으로써(1609년) 설치되게 되는데 조감도에 보듯이 건물들이 완성된 것은 1618년이었다.
장소는 오늘의 수정동의 고관(고 왜관의 약칭)으로, 용두산 주변의 초량 왜관으로 옮긴 뒤 이렇게 불렸다. 규모는 동서 1백26보(1보는6척), 남북 63보로 약1만평, 동문밖에 좌천이 흐르고 있었는데 조감도에도 좌천이 그려져 있다.

<왜관모습 첫 그림>
두모포 왜관의 남쪽에 방파제를 만들어 선창으로 삼았으나 수심이 얕고 여름의 남풍때는 파도가 심해 어려움이 많았었다. 그래서 일본측은 왜관이전을 요청, 오랜 교섭끝에 1678년 용두산 주변 10만평 넓이의 초량 왜관으로 옮겼던 것이다.
여기서 이 조감도가 제작된 연대를 좁힐 수 있게 되었다. 즉 두모포 왜관이 존속되던 1618년부터 1677년 사이에 그린 것이며 따라서 17세기 중엽의 부산모습을 보여주는 귀중한 조감도인 것이다. 그리고 두모포 왜관의 모습을 알 수 있는 그림은 오늘까지 알라진바 없기 때문에 17세기의 한일관계사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된다.
한국의 국제도시인 부산시. 금세기는 용두산 주변을 중심으로 발전했지만 17세기의 부산은 오늘의 범천동과 좌천동일대가 그 중심이었으며 또한 한국의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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