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고선지장군의 발길을 따라 카라코룸 하이웨이를 가다. <2>|″전사 최대의 자취〃찾고픈 욕망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이번 역사기행은 처음부터 어려움이 있었다. 동국대개교 8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파키스탄과 북인도에 대한 학술조사계획이 진행되던 작년9월부터 그 조사 대상지역을 놓고 조사단뿐 아니라 대학 밖에서도 걱정하는 분들이 적지 않았다.
이번 조사계획에 깊은 관심을보인 주한파키스탄 대사관측에서도 관계자들은 기르기트 (길이길특)와 이 도시 서북의 아프가니스탄 접경지대인 달코트령의 답사에는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2차선 아스팔트 길>
인도대륙의 지도를 펴놓고 보면 누구도 이번 여행이 그리만만치 않으리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세계에서 험준하기로 이름난 히말라야·카라코룸·힌두쿠시와 세계의 지붕이라고 일컬어지는 파미르고원의 4대 산맥이 문어발처럼 사방으로 뻗어나간 곳, 그 머리부분의 해발1천4백m나 되는 산악지대에 위치한 소도시 기르기트를 여행하기엔 시기가 좋지 않다는 의견들이었다.
기르기트행은 파키스탄의 수도 이슬라마바드에서 정기적으로 F-27터보 프로펠러기의 항로가 있어 1시간이면 도달할 수 있다고하나 12월이면 기류의 변화가 심하여 결항하는 것이 보통이라고 여행안내서에도 적혀 있었다. 심한 경우에는 까다로운 탑승절차를 밟아 겨우 기내에 들어가 땀을 식히고 있는 손님일지라도 짐짝과 더불어 되돌려 보내는 일이 드물지 않다는 경험자들의 얘기이고 보면 항공편을 이용한다는 것은 복권에 당첨되는 행운만큼이나 기대하지 않는 것이 현명할 것 같았다.
그렇다고하여 착수한지 20년만에 중공의 협조로 지난78년 준공한 카라코룸 하이웨이를 이용하는 쪽도 이 시기에는 확실치 않다는 얘기였었다.
이슬라마바드에서 중공과의 국경선까지 7백50㎞가 넘는 이 길은 아스팔트로 잘 포장된 2차선 도로인 것은 틀림없으나 세계에서 두번째로 높다는 8천6백13m의 K 2봉과 낭가파르바트, 라카포시 등 7천8백m급 고봉을 비롯하여 6천m가 넘는 봉우리만도 70개나 되는 카라고름산맥의 허리를 끊고 닦인 길이다. 따라서 눈이 내리는 경우에는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악조건 때문에 기르기트의 답사를 포기한다는 것은 나로서는 있을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인도대륙의 가장 서북부에 자리잡고 있는 이 도시가 예부터 중국인에게 소발률국 (소발률국)으로 알려져 교통·무역의 중심지로 유명했고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북부파키스탄의 가장 중요한 무역·정치·군사·행정의 도시로서 동서의 문화 교섭사를 알려면 꼭 가보아야 할 곳이었기 때문이다.

<금속성 북괴인 음성>
이른바 「비단길」이라는 동과 서의 두 세계를 연결하는 교역로의 한갈래속에서 이 소발률국이 차지하는 위치는 절대로 경시 할 수 없다. 어떤 댓가를 치르더라도 반드시 카라코룸 하이웨이와 기르기트를 답사하겠다는 결심을 굳힌 것은 나에게 주어진 조사과제가『동서 교통로의 옛과 지금』이기 때문이기도 했으나 한편 세계의 전사에서 가장 빛나는 업적을 남겼으면서도, 비참한 죽음으로 생애를 마친 고구려출신 당장 고선지장군이 활약했던 그 자취를 밟아보고 싶은 욕망이 어쩌면 더 컸던게 아닌가 하는것이 솔직한 고백이다. 747년 군사 1만을 거느리고 고금에 탁월한 산악전을 벌여 소발률국(지금의 기르기트)의 수도인 아나월성을 점령했던 고장군.
태국의 방콕에서 비행기를 갈아타고 파키스탄의 무역과 교통의 심장부인 카라치에 도착한것은 지난 12월8일 저녁9시. 「M·R·칸」씨가 마중 나왔다. 그는 정부의 부국장급인사로 파키스탄 고고학회 회원이기도 했다. 파키스탄내에서의 연구조사활동에 안내를 맡게됐다고 자기를 소개한「칸」씨는 미리 예약된 숙소로 우리일행을 안내했다. 그 자리에서 우리는 조사 대상지에 대한 재검토에 들어갔다.
「칸」씨는 먼저 안전하고 기후가 좋은 탁실라와 간다라부터 돌아보고 카라코룸하이웨이는 뒤로 미루었다가 형편을 보아가며 답사하자고 제의했다.
기르기트는 자기도 가보지 못한 곳이어서 불안할 뿐 아니라 카라코룸 하이웨이의 구석진 곳에는 아직도 옛 지방군주들의 잔재세력이 남아있어 치안 확보상 저녁 5시부터 군이 차량통행을 통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무리들은 이 하이웨이 공사때에도 적지않은 반항을 했을 뿐 아니라 지금은 도적처럼 야간통행자들의 생명과 재물을 빼앗는 일이 간혹 일어난다는군요』라는 그의 말투에서 조사단의 앞날에 만날 수 있는 변수가 예감되는 것 같았다. 어쩌면 오랫동안 꿈에 그리던 「비단길」의 그 옛길과 기르기트의 거리를 밟아 보지도 못하고 되돌아가는게 아닌가하는 불안과 초조가 교차했다.
이와 같은 불안을 더욱 고조시킨 것은 국내의 교통사정 이었다.
고대 인도문명의 자취를 알려주는 유적으로 세계사에 널리 알려진 모헨조다로의 당사를 마치고 미리 예약된 12일 낮1시30분 비행기를 타려고 준비를 서두르고 있는데 그 비행기가 약5시간 늦는다는 공항으로부터의 연락이 왔다. 만약 이 비행기가 그때까지 뜨지 못하면 다음 비행기까지는 3일을 더 기다려야 한다니 초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7시가 지나서야 8시30분 물탄까지의 비행기가 있다는 공항당국의 연락을 받고서도 마음의 긴장을 가라 앉힐 수가 없었다. 결국 9시가 돼서야 이륙한 이 비행기가 밤11시에야 물탄에 도착, 그때 겨우 저녁식사를 할 수 있었다.
미리 예약한 항공편을 버리고 안전한 육로를 이용할 것을 다짐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결국 다음날인 l3일 새벽6시30분 에너지 절약책의 하나로 단전된 암흑속에서 간단한 아침식사를 마치고 밴 15인승 차로 하라파로 향했다. 계속달려 파키스탄 제2의 도시 라호르에 도착한 것이 하오7시였으니 이대로라면 기르기트 하이웨이의 답사는 더 어려워진다는 비관적인 예감이 우리들의 마음을 어둡게 했다. 더우기 하라파박물관의 방명록에 지난해4월 「인민공화국 김영남」의 이름으로 적어 남긴 간단한 방문소감도 마음에 걸리지 않을 수 없었다.

<곳곳에 한글간판>
이른바 「인민공화국」 의 이름에 놀랐던 것은 하라파박물관에서만이 아니었다. 15일 이 나라의 행정수도 이슬라마바드에 도착, 숙소에 짐을 풀고 안내인에 부탁하여 알려준대로 걸었던 전화에서 『여기는 인민공화국대사관입니다』라는 금속성 목소리가 튀어나왔을 땐 얼른 수화기를 내릴수 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이러한 불안을 다소 가라앉일 수 있었던 것은 우리대사관의 황현탁공보관의 주선으로 대사관저에서 열린 그곳 신문기자들과의 만찬회에 초대받아 참석한 후 부터였다.
홍순영대사는 우리업체가 12개사나 진출, 밤낮으로 뛰고 있어 교역량도 늘고 양국간의 정상회담에 힘입어 외교면에서도 북한을 훨씬 앞지르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카라치에서 된장찌개를 우리에게 맛보여 주었던「진고개」란 한글간판과 이곳에 진출한 우리나라 기업체들이 거리에 세운 큼직한 간판들이 인상적이었다.
『이곳의 자동차가 스즈끼·혼다·도요따 등 대부분이 일제인 것은 그 차가 좋아서가 아니라 값이 싸서입니다. 그네들은 수입국의 경제상태에 따라 차체에 양철을 쓴다든가 중요치 않은 부분을 빼서 원가를 줄이는 수출용 차를 만들어 팔고 있으니까요. 우리나라 업체들은 그런 공장을 따로 지을 여유가 없어 경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중소기업의 진출은 매우 희망적입니다』라고 신성오공사는 설명했다.
그날저녁의 모임에서 더욱 고마왔던 것은 황공보관이 지금이라면 카라코룸 하이웨이 여행에 큰 곤란은 없을 것이라는 상황설명이었다. 간다라나 스와트 계곡의 답사를 뒤로 미루고 카라코룸 하이웨이와 기르기트 답사부터 하기로 조사단이 뜻을 모으게 된 것도 황공보관의 상황설명에 힘입어서였다.
거기에 l6일아침 대사관의 주선으로 중앙아시아사학보의 편집자이며 카라코룸 하이웨이의 무수한 암벽화와 고문자 연구의 권위자인「A·H·다니」교수와의 만남에서 어떤 일이 있더라도 카라코룸 하이웨이만은 답사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히고 다음날인 17일아침 탁실라로 향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