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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과 회화 넘나드는 협업, 클래식 디자인에 재미 입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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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8호 8 면

지난 2월 여성 컬렉션에서 처음으로 선보인 버버리 패치워크 백. 루크 에드워드 홀은 트렌치코트의 버클 벨트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이 백을 그림으로 옮겼다.

자신을 닮은 일러스트 앞에 선 루크 에드워드 홀.

영국 디자인의 팬이라면 새로 주목해야 할 이름이 나타났다. 루크 에드워드 홀(Luke Edward Hall)이다. 올해 스물여섯 살로 장난기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이 디자이너는 본업인 인테리어 디자인 외에 패션ㆍ회화ㆍ사진 등으로 마구 영역을 넓혀가고 있는 중이다.


대표적인 것이 럭셔리 브랜드 버버리와의 협업이다. 버버리는 올해 초 대대적인 변화를 예고했다. 기존 버버리 브릿ㆍ버버리 런던ㆍ버버리 프로섬의 3가지 라인으로 선보이던 남성과 여성 컬렉션을 버버리 레이블 하나로 통합하고, 1년 동안 네 번에 걸쳐 진행하던 런웨이 컬렉션도 남성과 여성을 합쳐 두 번만 하기로 한 것이다.


불필요한 경계를 없애고자 마음먹은 버버리는 이 젊은 아티스트와 손을 잡았다. 20년 넘도록 버버리와 작업하고 있는 포토그래퍼 마리오 테스티노의 사진에 루크의 일러스트를 더해 새로운 광고 캠페인을 하나의 작품처럼 만든 것. 클래식한 전통을 추구하는 브랜드로서는 매우 이례적이다.


결과는 매우 성공적이다. ‘오래된 것, 새로운 것, 빌려온 것, 파란 것’이라는, 주로 여성에게 적용되던 결혼의 테마를 가져온 남성 컬렉션의 아우터 웨어와 트렌치 코트는 한층 편안하면서도 스타일리시한 그림으로 재탄생했다. 각기 다른 영국의 마을 이름을 본따 만든 패치워크 백 역시 특별함을 더했다. 다양한 색상과 패브릭이 어우러져 이 세상에 하나뿐인 백이란 이미지에 그로부터 영감을 받은 일러스트가 더해져 진정한 의미의 유니크가 완성된 덕이다.


지난달 런던 플래그십 스토어에서 전시를 마친 루크 에드워드 홀의 아트워크는 무대를 옮겨 서울 플래그십에 안착했다. 13~31일 열리는 전시에 앞서 중앙SUNDAY S매거진이 가장 먼저 전시장을 찾아 그를 만났다. 이번 전시를 가장 잘 즐길 수 있는 방법에서부터 그의 작품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팁까지, 궁금했던 질문들을 쏟아냈다.

버버리 서울 플래그십 매장 곳곳에 루크의 작품이 전시돼 있다. 원목 나무 상자가 설치돼 있고 하얀 천으로 군데군데 덮혀 있어 한층 아틀리에 같은 느낌이 더해졌다.

트렌치코트를 입은 모델 에디 캠벨의 모습을 담은 마리오 테스티노의 사진(오른쪽)과 루크 에드워드 홀의 아트워크가 결합된 버버리의 새로운 광고 캠페인.

곳곳에 원목으로 만들어진 박스, 아틀리에로 재탄생한 버버리 서울 플래그십 12일 미리 찾아가본 버버리 서울 플래그십의 모습은 그간의 엄숙한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다. 마치 아틀리에처럼 원목으로 만들어진 박스가 군데군데 설치돼 있었다. 버버리 제품은 이를 프레임 삼아 한 폭의 그림이 된 듯 그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아트워크 전시와 함께 이번 패치워크 백 컬렉션에서 영감을 받은 6가지 멀티 컬러의 모노그래밍 서비스와 새롭게 단장한 스카프 바까지 합세해 공방 같은 느낌을 자아냈다.


쇼윈도 가득 자신의 작품이 들어차 있고, 아예 미디어 월까지 마련해 그의 작품을 비추고 있는 매장에 들어선 루크는 이 모든 광경이 신기한 듯 했다. “지난겨울 버버리로부터 함께 일해보자는 전화를 받고 무척 놀랐어요. 런던 사무실로 가서 회의를 하고 이번 캠페인을 같이 해보자고 했을 때는 정말 흥분됐죠.”


버버리가 왜 당신을 택했을까. “글쎄요. 버버리는 진정 영국적인 브랜드잖아요. 저는 햄프셔 베이싱스토크 출신이니 어릴 적부터 버버리에 대해서는 익히 잘 알고 있었고요. 유서 깊은 전통의 바탕 위에 트렌치코트 같은 아이코닉 아이템을 끊임없이 변화시켜 나가는 신구의 조합 같은 면이 저랑 잘 맞았던 것 같습니다.”


작업은 어떤 식으로 진행됐는지. “먼저 마리오 테스티노가 찍은 캠페인 사진을 보여줬어요. 백이나 의류 등 사진에 등장한 제품들을 실물로 보기도 했고요. 저는 그것들을 앞에 놓고 영감이 떠오르는 대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평소 컬러를 중시하는 편인데 이번 컬렉션에 사용된 색 자체가 굉장히 부드러우면서도 깊고 선명해서 큰 도움이 됐어요. 모든 작업은 자유로우면서도 자연스럽게 진행됐습니다.”


그림을 그릴 때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는 편인데. “네. 저는 한 가지 재료를 고집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요. 워터컬러ㆍ페인트ㆍ초크ㆍ파스텔ㆍ아크릴 등 각기 다른 색감과 질감을 가진 재료들을 혼합해서 사용하는 걸 좋아합니다.”


그 중 가장 선호하는 재료를 꼽자면. “아마도 워터컬러? 브러시를 놀리다 보면 어떨 땐 두껍게, 어떨 땐 얇게 칠해져서 다양한 변화를 줄 수 있는 장점이 있지요.”

영국 런던의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루크 에드워드 홀. 화려한 색감을 좋아하는 그의 취향을 반영한 초록색 벽이 눈에 띈다.

아래는 크리스티 옥션 하우스에서 판매되는 제품과 루크의 개인 소장품을 함께 스타일링한 모습. 앤티크하면서도 빈티지한 감성이 동시에 묻어난다.

“그림은 가장 개인적인 작업 … 모든 디자인은 여기서 시작된다” 워터컬러로 밑그림을 그리고 파스텔과 초크로 쓱싹쓱싹 색을 채워넣는 모습을 상상해보면 그가 전형적인 미술학도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은 센트럴 세인트 마틴에서 남성의류를 전공한 패션학도다. 그러니 이번 작업은 새로운 영역에 대한 도전이자 친숙한 필드로의 귀향이라 할 수 있다.


그림은 따로 배웠는지. “대학에 들어가기 전에 회화와 사진, 그래픽 디자인을 배웠어요. 2014년 홈 웨어 하우스를 설립한 뒤 지금은 인테리어나 패브릭 혹은 세라믹 같은 일을 주로 하고 있지만,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으니 한 번도 그림을 떠난 적은 없는 셈이죠.”


그 많은 작업 중에 가장 즐겨하는 건. “역시 그림이죠. 매일 하는 작업이기도 하고 가장 개인적이면서도 자연스러운 작업이니까요. 사실 다른 작업들은 서비스에 좀 더 가까워요. 먼저 그림을 그리고 그 패턴을 활용해 원단을 만든다거나 도자기에 접목시키는 것이니까요. 모두 다른 일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시작은 다 같은 곳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고대 로마 문양에서 영감을 얻은 쿠션

판매 제품 중엔 쿠션이 많던데. “쿠션은 원단을 활용하기에 가장 간편하면서도 유용한 방법이니까요. 사람들이 점점 과감한 컬러를 사용하고 패턴 활용에 있어서도 용감해지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부담스러워하는 분들이 대부분이죠. 쿠션은 포인트 아이템이기 때문에 컬러와 패턴에 입문하기에 적합합니다.”


디자인할 때 가장 중시하는 요소도 컬러인가. “네. 저는 분홍ㆍ노랑ㆍ초록ㆍ오렌지 등 밝은 색을 좋아해요. 색을 가지고 실험하는 걸 좋아합니다.”


그럼 주로 어떤 것으로부터 영감을 받나요. “제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건 영국 문화와 역사예요. 지식인과 예술인 모임이었던 블룸스버리도 그렇고 그래픽 디자이너 던컨 그랜트도 그렇고. 1920~30년대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시대입니다. 이탈리아도 좋아해요. 고대 로마의 색감이나 질감은 무척 매력적이니까요.”


온라인 앤티크 스토어도 운영했다고 들었는데. “대학 다닐 때 했어요. 시장에 가서 컵이나 지갑 같은 오래된 물건들을 사모아서 되팔곤 했죠. 같이 하던 친구가 홍콩으로 돌아가고, 저도 새로운 일을 시작해서 더 이상 할 수 없게 됐지만, 지금도 앤티크 숍에 가는 걸 좋아해요. 가끔 이베이로 경매도 하고 여행을 갈 때면 꼭 무언갈 사서 돌아오니 집에는 오래된 물건들이 넘쳐나죠. 중국 도자기나 그릇 같은 것도 좋아하고요.”

버버리 런던 플래그십의 토마스 카페에서 판매하는 메뉴를 보고 영감을 얻어 만든 키링. 제품과 그림을 자유롭게 오간 덕에 독특한 느낌의 라이프 스타일 이미지가 탄생했다.

“영국적 디자인이란 약간은 변덕스러운 것” … 호텔·와인과도 협업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그의 모습도 다르게 보였다. 처음엔 노란색 바지에 힘껏 머리를 올린 철부지 소년처럼 보였는데 질문을 곱씹을 때마다 때로는 청년 아티스트가, 간혹 장인정신이 느껴지는 장년의 남성이 설핏 튀어나왔다. 가장 영국적인 디자인이란 무엇인가란 질문에 그는 “약간은 변덕스러운(quirky) 것”이라고 답했다. 영국이라고 하면 매우 오래되고 클래식한 이미지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 안에 재미있는 면도 있고 이상한 면도 있듯 다양한 성격이 녹아들어있기 때문이란다.


다양한 분야를 종횡무진한 그의 포트폴리오도 그랬다. 버버리 같은 기성 브랜드와의 작업도 있었지만 미국의 팜 스프링 호텔과 컬래버레이션을 한다거나 런던 크리스티 옥션 하우스를 꾸민다는 식으로 도무지 예측이 불가능했다. 전통을 좇는 듯 하면서도 미지의 영역으로 나아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행보랄까.


컬래버레이션이 무척 활발합니다. “운 좋게도 지금까지는 그쪽에서 먼저 연락을 해 왔어요. 다행히 제가 좋아하는 곳들이었고요. 서로 좋아하지 않는다면 함께 일하기 힘들었을 테죠. 덕분에 즐겁게 일할 수 있었습니다.”


작업을 선별하는 기준은. “그런 건 특별히 없어요. 함께 즐겁게 작업하다 보면 저 역시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을 테니까요. 예를 들어 버버리와 작업을 하면서는 새로운 수준의 존경심을 가지게 됐어요. 그 짧은 시간 동안 전세계 어느 매장에 가나 제 작품이 걸려 있는 경이로운 경험을 가능하게 해 줬고요. 런던 플래그십의 토마스 카페에서 메뉴를 보고 즉흥적으로 생선과 새우 그림을 그렸는데 그런 것들이 키링으로 재탄생하게 됐잖아요. 신기한 경험이죠.”


크리스티 옥션 하우스와 팜 스프링 호텔 같은 곳과는 어떻게 작업을 진행하게 됐는지. “팜 스프링 호텔을 위해서는 그림을 30~40장 정도 그렸어요. 호텔 방에 있는 안내 책자를 통해 수영장이나 방 등을 그린 그림을 볼 수 있는 거죠. 그 그림들이 액자에 담겨 호텔 곳곳에 걸려 있기도 하고요. 반면 크리스티는 스타일링에 가까워요. 옥션에서 파는 제품과 제 방에 있던 소장품을 매칭해 일종의 화보 촬영을 진행한 거죠. 이렇게도 활용할 수 있다고 보여주기 위해서요.”


인테리어 팁이 있다면. “가장 좋은 인테리어란 그 사람의 인격을 반영하는 것이라 믿습니다. 당연히 저희 집은 매우 컬러풀하고 제 취향이 녹아있는 오래된 물건들이 가득하죠. 그래서 옥션과의 작업도 별로 어렵지 않았던 것 같아요. 거기서 판매하는 체스판이나 도자기 같은 게 제 캐비넷 위에 놓여 있어도 전혀 이질감이 없었거든요.”


그의 일정표는 앞으로도 빽빽했다. 영국 시골의 오래된 하우스 인테리어를 진행하는 한편 영국 와인 회사의 리미티드 에디션을 위해 라벨에 들어갈 일러스트 작업도 하고 있다고 했다. 미국 편집숍 앤스로폴로지와의 협업도 예정되어 있다고 덧붙였다. 앞으로 더 많은 공간에서 그의 작품을 마주하게 되는 건 아마도 시간 문제일 것 같다. ●


글 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ㆍ버버리ㆍ루크 에드워드 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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