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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천불 고지에서 「성숙의식」을 다지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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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뒤도 안 돌아보고 내달린 「근대화」 강행군 25년, 2천달러 고지를 마침내 밟았다.
선진의 문턱, 그러나 정체와 좌절의 위험이 도사린 갈림길로도 풀이되는 1인당 GNP 2천달러 시대.
국민들의 욕구가 폭발하고 다원사회가 형성되며 여러 불균형과 갈등이 첨예화하는 때이기도 하다.
다원사회가 조화를 이루면서 제 기능을 잘 발휘해야 한 단계 높은 선진 성숙사회로 비약할 수 있다.
이 고비를 넘기는데 남미제국은 실패하여 선진의 문턱에서 정체사회로 후퇴하고 일본은 모범적으로 선진권에 진입했다.
벌써 이 단계에선 경제적 효율성이나 추진력만으로는 미흡하며 정치·문화·사회규범등 여러 성숙의 조건이 필요하다.
2천달러시대를 맞아 한국의 좌표는 어디이며 지금 제 길을 가고있는가. 선진 성숙사회로 가는덴 무엇이 미흡하고 어느 것을 서둘러 고쳐야하는가.
2천달러 시대의 초입에 서서 한국의 실상을 냉정히 진단하고 앞으로의 옳은 방향을 찾는 것이 시급하다.
본지가 새해 켐페인의 초점을 성숙사회로 가는 길에 맞춘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서울 영동-. 「한강의 기적」을 상징하는 새 시가지 곳곳, 숲을 이룬 아파트단지의 아침은 자동차의 시동소리로 시작된다.
골목마다 입구마다 꽁무니에서 하얀 연기를 내뿜으며 부르릉거리는 포니·맵시·브리사· 스텔라·프레스토·레코드·로열·봉고등 국산차들의 행렬.
불과 15년 전 농가의 아침짓는 굴뚝연기가 안개속에 피어오르던 목가적 전원풍경은 이제 숲을 이룬 아파트단지의 국산승용차매연으로 바뀌었다.
『최근 2, 3년새 승용차가 2배 이상 늘었읍니다. 현재 4천4백24가구 중 약40%인 1천7백여가구가 자기차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는데 하루가 다르게 차가 늘기 때문에 올 여름께 가면 주차난이 예상됩니다. 』
영동에서는 전형적인 중산아파트촌인 대치동 E아파트단지 관리계장 임봉춘씨(45)의 걱정.
빠른 속도로 보급되며 시민들의 의식과 생활을 바꾸어놓고 있는 「마이 카」는 2천달러 시대의 상징적 현상이다.
『「로스토」 교수에 따르면 경제성장단계에 따라 소비생활은 소형내구재에서 대형내구재로 옮겨간다고 합니다. 경제개발의 초기에는 라디오·자전거·재봉틀 같은 소형 내구재가 보급되다가 성숙단계에 들어서면 흑백TV·냉장고·전축 등 중형 내구재가 보급되고 대량소비단계에·이르면 자동차·에어컨·컬러TV·VTR등 대형소비재보급이 일반화된다는 거지요.
이를 기준하면 우리나라의 현재는 대체로 성숙단계를 지나 대량소비 단계로 막 진입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
서울대 송병낙교수 (경제학) 의 2천달러시대 진단.
우리를 앞서가는 미·일은 3A(공장·사무·가사자동화)로 대표되는 4차 산업혁명과정에 들어서 대량소비의 「그 다음 단계」, 탈산업사회·정보사회·고도기술사회 등으로 일컬어지는 문명의 새 세기로 옮겨가고 있지만 이들 나라들이 50∼60년 걸렸던 도약에서 성숙까지의 과정을 한국은 3분의1로 단축함으로써 60년대 초 3단계 격차를 이제 거의 1단계 격차로 좁혔다고 송교수는 말한다.
국제수지를 가지고 한나라의 경제발전단계를 ①미성숙채무국 (국제경쟁력이 의해 무역수지는 적자이며 빚을 빌어오기 시작) ②성숙채무국 (무역수지는 흑자가 되지만 외채이자로 경상수지는 적자) ③채무상환국 (무역흑자가 늘어 외채를 갚기 시작) ④미성숙채권국 (무역·경상수지가 모두 흑자를 보여 채권국으로 전환) ⑤성숙채권국 (국제수지흑자가 계속되다가 후기에 들어선 무역흑자가 나기 시작) ⑥채권회수국 (저축했던 외국자산을 까먹는 상태) 의 6단계로 구분하는 공식에 따르면 한국은 지금 성숙된 채무국에서 채무상환국으로 넘어가는 과도기로 보겠다.
정부는 86년엔 경상수지가 균형을 이루고 87년부터는 빚을 갚아가기 시작할 것이라는 청사진을 내놓았다. 일본이 만개된 꽃이라면 한국은 피기 전의 꽃봉오리라는 것이다.
국제수지 면에서 나라마다 영고성쇠가 있는데 산업혁명을 가장 먼저 일으킨 영국은 1차대전후엔 채권국의 지위를 미국에 넘겨 주었다. 미국다음은 일본으로 일본은 68년부터 채무국에서 채권국으로 올라서고 금년 들어선 미국이 채무국으로 떨어지는 대신 일본이 최대 채권국이 되었다.
한국은 일본다음의 채권국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20여년 동안 이처럼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룩했지만 서둘러오느라고 군데군데 그늘도 많다.
마이 카를 갖추고 안락한 아파트에서 서구적 생활을 즐기는 중산층이 많이 늘었고, 또 급속히 늘고 있으나 국민전체로 볼 때는 아직 저변이 튼튼하지 못하다. 아파트촌에서 30분만 더 가면 달동네가 있고 같은 학교에서도 생활격차 때문에 서먹서먹한 경우가 많다. 그 격차는 생활수준의 향상과 더불어 점점 눈에 띄게 나타나고, 그것이 사회갈등의 큰 요인이 되고 있다. 성숙사회를 위해선 중산층의 확대와 사회균질화의 접근이 필요하다.
통상임금 월10만원미만 저임금근로자가 전체 제조업근로자의 13·5%인 30만1천여명에 이르고, 75년 1백33건에서 85년 (11월말현재) 2백46건으로 늘어나고 있는 노사분규. 또 도농간의 불균형 발전도 정치·사회적인 측면에서나 경제적 측면에서 큰 마찰요인이 되고 있다.
비교우위론을 내세운 농수산물의 수입개방정책과 농업채산성의 악화, 주택개량·영농기계화등 농가능력을 넘어선 시책의 강행, 그리고 높아진 소비성향으로 현재 농촌은 가구당 빚이 2백만원선.
튼튼하고 건전한 농촌이 있어야 공산물의 구매시장도 형성되고 도시집중도 줄일 수 있다. 앞으로의 지속성장을 위해선 도농간의 균형발전이 시급하다.
그보다도 더 심한 불균형은 물질적 성장을 뒷받침 못하는 윤리의식·직업의식·시민의식의 미성숙, 그리고 근대화의 기본명제인 정치와 사회의 민주화부진.
서울 영동의 꼬리를 무는 자동차행렬도 필경은 2천달러 자동차문명시대와는 걸맞지 않은 혼란스런 일상속으로 묻혀버린다. 『도곡동 아파트에서 삼일로 사무실까지 가는 동안 으례 몇 차례는 손에 땀이 배고 입에서는 욕설이 터져 나오곤 해요. 손수 운전자인 회사원 박광수씨(36·H산업과장)도 그렇게 하루를 시작한다고 했다.
큰길로 들어서자마자 덜컹 흔들리는 차. 팠다, 덮었다 몇 차례나 덧씌우기 포장 끝에 길보다 2cm쯤 낮아져있는 맨홀이 몇 달째 그대로다.
총알같이 달려온 화물트럭이 스칠 듯이 박씨차를 앞질러 뒤도 안 돌아보고 내닫는다. 자동차시대는 됐으나 그에 뒤따르는 자동차문화는 없어 세계 최고의 사고율을 자랑한다.
GNP는 2천달러수준에 갔으나 각분야의 질서의식은 아직 미개상태다. 경쟁의 룰과 페어 플레이 정신이 확립되지 못했다. 노는 문화·공중도덕도 마찬가지다. 급속한 물질적 성장에 정신적 문화가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정치는 몇백달러 수준이라는 한탄까지 나오고 있다.
안방 깊숙이 파고든 TV는 쇼와 스포츠가 너무 많고 유흥지마다 세련되지 못한 풍경 때문에 눈살이 찌푸려진다.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을 앞두고 질서지키기와 화장실 깨끗이 하기 운동이 벌어지고 있지만 아직 뚜렷한 성과를 못 거두고 있다. 또 각분야에서 새치기는 얼마나 많은가. 2천달러 시대에 비해선 너무 낮은 문화다. 또 모든 끗발이 서울에 집중되어 약육강식을 가중시키고있다.
전 인구의 25%가 전국토의 0·006%인 서울에 모여 살게 해놓고는 지방분권이나 국토의 균형적 발전은 기대할 수 없다. 서울공화국의 비대증을 그대로 두고는 성숙사회의 진입에 한계가 있다.
왜 서울로 서울로 몰리는가. 여기에 바로 2천달러 시대의 다원사회에 걸맞지 않은 부와 권력과 명예의 가속적 집적현상을 캐볼 수 있을 것이다.
최근 15년새 10대도시로만 6백만명이 옮겨간 민족대이동이 일어나 전체국민의 75%가 이제는 도시에 산다.
그 중에도 수도권과 부산의 두 중심에 국민 세 사람중 한사람인35%가 몰렸다. 대대로 살아온 농어촌 고향을 떠나 몰려든 사람들로 도시는 만원. 10가구 중 적어도 4가구이상이 집이 없어 셋집살이다. 주택보급률은 84년 말 현재 전국 평균 66·6%(서울은 60%)다.
상수도보급률은 64% (서울97·5%), 하수도 보급률은 고작 8%(서울93%), 의료보장혜택을 못 받는 국민이 49·8%다.
세계에 유례없는 교육열은 국교취학률에서 미국 (93%), 일본 (95%)보다 높은 98%로 최선진을 기록하고 있으나 학급당 학생수에서는 거꾸로 최하위에 가까운 60명선. 미국의 15명선, 중진국 평균 30명선의 배가되는 콩나물교실에서 전근대의 주입식교육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어린이들은 놀이기구·그림책·TV·만화등을 통해 이미 우주시대를 살고 있다. 그러나 학교교육은 그런 어린이들의 탐구심을 충족시켜주고 창조력을 키워줄 환경여건을 거의 못 갖추고 있다. 우리가 가진 자원이 사람뿐이고, 그것은 교육을 통해 생산된다고 볼 때 앞으로 고도기술사회로 가기 위해서는 교육에서 지금 그야말로 「혁명」 이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매우 절박한 상황이라고 본다. 』 동국대 사범대 배종근학장 (교육경제학).
빈약한 교육투자 못지 않게 교육의 질과 내용도 문제. 일류학교졸업장과 학위에만 쏠린「겉」추구 교육열 때문에 입시준비가 교육의 전부가 되고만 풍토는 지금까지 성장의 원동력이었던 교육열이 어쩌면 이제 성장의 장애가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까지 안기고 있다.
『2천달러 시대라고 하지만 우리의 2천달러와 서구나 일본의 그것을 같이 보아서는 안 된다. 그것은 우리가 지고있는 5백억 달러의 외채나 그 동안 화폐가치의 변동만을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질적인 차이가 크다고 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오랫동안 합리적사고와 근검을 체질화하면서 모은 재산과 단기간에 부동산투기까지 곁들여 얼렁뚱땅 모은 재산을 액수만 같다고 같이 볼 수는 없는 것이다. 』한양대 김용운교수 (수학과).
2천달러를 대견스럽게만 보고 정·교육·문화·기술전반에서 지지율의 확대를 통한 자주화·능률화, 그리고 인간화가 당장의 과제라고 주장했다.
『지금은 다시 도약하기 위해 몸을 움츠리는 호랑이처럼 불균형을 바로잡아 재도약의 탄력을 회복하는 조정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고대 임희섭교수도 지나친 물질주의를 극복해 보다 인간을 존중하는 생활양식을 추구해야 한다고 했다. <문병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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