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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개헌, 정치인 헌법학자 전유물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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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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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제
서강대 교수·경제학

개헌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다. 지금 한국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들을 국가권력구조 개편 없이는 해결해 나가기 어렵다는 공감대가 넓어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개헌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는 무엇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하는 것이다.

건국 초기 이 나라의 지도자들은 너무나 무비판적으로 혹은 맹목적으로 서구의 법과 제도를 도입했다. 서구에서는 18세기 자유주의·합리주의 등 계몽사상이 시민들에게 확산되면서 프랑스에서는 시민혁명, 미국에서는 독립전쟁, 영국에서는 국왕과 귀족, 귀족과 평민들의 타협을 통해 오늘날과 같은 정치제도와 통치구조를 발전시켜 왔다. 갈등, 혁명, 혼란, 전쟁, 대공황을 거쳐오며 그들이 겪은 삶과 사회현상, 추구하는 가치를 하나하나 벽돌 쌓듯 새로운 국가제도, 사회질서로 정착시켜 온 것이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시민의 권리와 동시에 책임·의무를 익히며 이것을 자식들에게 교육하고 전수하며 오늘날 민주주의의 절제, 자율적 시장규율과 같은 질서가 자리 잡게 됐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 20세기 초까지 절대왕정과 유교적 사회질서하에 조선의 백성으로, 일제 강점기에는 일왕의 신민으로 살다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윤리가 무엇인지 잘 알지도 못한 채 갑자기 신생 민주공화국의 시민으로 태어나게 된 것이다. 민주주의는 우리 국민이 투쟁·갈등·혁명을 겪으며 쌓아온 제도가 아니라 연합국의 대일본 승전의 결과 하루아침에 선물처럼 주어진 제도였다. 건국헌법은 전혀 그 법을 지키고 준수하며 그 법질서 속에서 살아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던 국민들에게 서구를 그대로 모방한 국가체제, 권력구조, 법체계를 도입한 것이다. 이것이 순조롭게 작동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편법과 탈법이 판치고 법과 현실의 관행이 괴리돼 법을 지키면 경쟁력이 떨어지고 법을 지키지 않는 것이 경쟁력을 높이는 사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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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우리는 짧은 기간에 눈부신 발전을 이뤄냈다. 그것은 우리가 민주주의를 제대로 해, 시장경제를 제대로 해 얻어낸 결과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을 잘 지키지 않음으로써 이뤄낸 한국적 결과였다. 법 제도와 현실적 운영이 크게 괴리됐던, 어찌 보면 실용적 접근이었으며 또 달리 보면 편법적·불법적 행위가 일상화된 뒤죽박죽인 발전 방식이었다. 그 결과 지난 60년간의 눈부신 경제적 발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한국사회는 부의 축적에 대해, 개인의 성취에 대해, 정부의 권위에 대해 국민들이 정당성을 잘 인정하지 않고 사회적 불신이 어느 나라보다 깊은 나라가 됐다.

지금 한국사회가 당면한 가장 중요한 도전은 강고한 기득권 세력이 계층 간 이동 통로를 틀어막고 유착과 담합을 통해 지대를 추구하는 불공정 사회, 부와 소득의 편중화로 인한 갈등사회, 자율적 감시, 규율이 결여되고 생태계가 파괴된 시장경제질서를 개혁해나가는 것이다. 이 시대적 도전을 돌파해 나가기 위해서는 기득권 세력에 쉽게 포획되는 국가권력이 아니라 정면으로 맞설 수 있는 국가권력구조가 필요하다. 권력의 분점이 아니라 권력의 집중이 오히려 필요하다. 그리고 집중된 권력이 부패하지 않고 독선적으로 흐르지 않도록 하는 내부적 통제장치의 도입이 필요하다.

한국이 여기서 더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단순한 선진국 제도의 모방이 아닌 우리 정치·사회·경제가 안고 있는 한계를 창의적 사고로 풀어나가려는 노력이다. 우리 역사와 사회적 관습, 국민들의 행동양식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 바탕 위에서 우리 국민이 어떤 공동체, 어떤 국가지배구조를 건설해 나갈 것인가에 대한 공의를 모아나가야 한다.

아직도 우리의 가정·학교·직장에서는 지난 수백 년 개인의 행동양식을 지배해온 유교적 가치와 질서, 관념이 상당 부분 주관하고 있다. 삼강오륜은 개인주의·자유주의에 바탕을 둔 서양의 사회질서, 행동양식과는 매우 다른 수직적 시민의 행동양식을 가르치고 있다. 가정과 학교, 직장, 사회적 질서와 동떨어진 국가지배 형태는 겉돌기 마련이다. 정치인들과 학자, 언론은 지금도 독일식, 프랑스식 등을 말하며 이 제도를 도입하면 우리 정치와 사회가 금방 그 나라들처럼 작동할 것으로 기대하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성공적인 개헌은 우리의 역사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 또 오늘날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질서가 행해지고 있는 서구 사회가 걸어온 그들의 역사와 가치, 철학을 보다 더 잘 이해하는 데에서 출발해야 한다. 개헌이 여야 정치인들의 단기적 이해관계의 타협 결과로 이뤄져서는 안 된다. 국가지배구조, 시장질서의 개편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것 없이 이 나라가 당면한 문제들을 바로잡아가기 어렵다. 그러나 정치인들과 헌법학자들에게만 맡겨져서 급조되는 개헌이 아니라 시간이 걸리더라도 이 나라 지성, 시민들의 폭넓은 토론과 공동적 모색을 통해 방향을 잡아나가야 한다.

조윤제 서강대 교수·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