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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박근혜와 유승민·사드·고등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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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김진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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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진
논설위원

사람들은 쉽게 분노·불안·충격에 빠지곤 한다. 과잉 정서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광우병과 세월호가 그러했다. 대중의 정서가 거칠어지면 대통령은 각별히 현명해야 한다. 진정성 있는 언어로 정면 돌파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적잖이 부족하다.

유승민 사태는 지난 1년간 한국 정치를 뒤흔든 최대 사건이었다. 급기야 집권당의 참패로까지 이어졌다. 그런데 유 의원의 복당으로 모든 게 원점으로 돌아갔다. 상당수 국민은 어리둥절하다. 도대체 무슨 일이었는지, 어떻게 없던 일이 됐는지, 앞으로 그들은 잘 지낼지 많은 게 궁금할 것이다.

혼란의 최종 책임자로서 대통령은 사태를 수습할 책임이 있다. 지난 8일의 청와대 오찬은 좋은 기회였다. 국민의 의문에 답하고 해결책을 찾을 절호의 찬스였다. 그런데 실패했다. 행사는 무미건조했고 대통령의 언어엔 생기가 없었다. 그는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고 연설했다. 그러나 별로 진정성이 보이지 않았다. 원고를 그저 맛없이 읽은 것이다. 30여 초 유 의원과 말을 섞었다지만 고만고만한 얘기였다. 그런 대화는 다른 의원과도 다 한 것이다. 그날 행사엔 무늬도 색깔도 없었다.

만약 마지막에 대통령이 이렇게 말했다면 어땠을까. “유 의원 문제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와 당이 유 의원의 정체성을 문제 삼았다고 하는데 핵심은 그게 아닙니다. 우리 당은 과거 사회주의 혁명을 신봉했던 사람들도 영입한 당입니다. 그런 판에 유 의원 정도 다른 생각이 뭐가 문제겠습니까. 제가 격분했던 건 조직의 질서 문제입니다. 평범한 의원이라면 생각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원내대표는 다릅니다. 그는 야전사령관입니다. 전투를 지휘하는 야전사령관이 생각이 다르다고 최고사령관을 공개적으로 비난하면 그 군대는 뭐가 됩니까. 솔직히 저는 실망과 배신감에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저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국민의 마음이 떠난 건 저와 당의 잘못입니다. 국민에게 죄송합니다. 여러분, 자 이제 폭풍우는 지나갔고 우리는 모두 함께 있습니다. 이제 힘을 합쳐 새롭게 출발합시다. 그래서 국민의 신뢰를 찾아옵시다. 단합의 건배를 제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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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 체계, THAAD)를 막겠다며 군수가 삭발하고 주민들이 데모한다. 지역이 정해지지 않았는데도 그런다. 레이더의 전자파 때문이란다. 이 나라에서는 위험에 대한 과학적 지식도 없이 일부 선동만 믿고 안보 시설을 막으려 든다. 이스라엘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사드 레이더는 반경 100m 정도만 사람의 접근이 통제된다. 100m 바깥에서부터는 사람들이 정상적으로 활동한다. 한국 기지에선 주한미군 요원 100~200명이 상주한다. 전자파가 위험하면 미국이 병사들을 그곳에 머물게 하겠는가. 그러니 이런 문제에도 대통령의 언어가 필요하다. “레이더가 배치되면 대한민국 국민 중에서 내가 가장 가까운 거리에 가겠다. 미군 병사보다 더 가까이 가보겠다.”

‘고등어 미세먼지’ 파동은 신중하지 못한 공무원이 국민에게 폐를 끼친 것이다. 환경부는 지난 5월 보도자료에서 이렇게 언급했다. “밀폐된 주방에서 재료 종류별로 조사한 결과, 고등어구이를 할 때 미세먼지 농도가 가장 높았다.” 요리할 때 환기를 잘 하자는 취지였지만 결과가 어디 그렇나. 고등어라고 특정 생선을 꼭 집으면 당장 먹는 이가 줄어드는 걸 생각하지 못했나. 아니나 다를까, 고등어 관련 어민·업자들이 시련을 겪고 있다. 그런데 대통령이 보이질 않는다. 정부의 실수로 적잖은 국민이 고통받는데 그는 조용하다.

청와대 새누리당 오찬 같은 데에 고등어구이를 내놓으면 왜 안 되는가. 중국 음식에 포도 주스보다 고등어구이에 막걸리가 낫지 않았나. 대통령이 이렇게 말했으면 어땠을까. “오늘은 특별히 고등어를 구웠습니다. 고등어는 싸고 맛있는 국민 생선인데 정부가 잘못해 오해가 생겼습니다. 사죄하는 뜻에서 여러분도 지역구에서 열심히 고등어를 드세요.”

1986년 1월 우주왕복선 챌린저가 공중에서 폭발했다. 그날 밤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TV 카메라 앞에 섰다. “고통스럽지만 이런 일은 인류의 개척 과정에서 종종 일어납니다. 비행사들은 지구의 굴레를 벗어나 신의 얼굴을 만졌습니다.” 이 연설로 미국인은 충격에서 벗어나 용기를 얻었다. 1년 전 오바마 대통령은 인종증오범죄로 피살된 흑인 목사의 장례식에서 ‘어메이징 그레이스(Amaging Grace)’를 불렀다. 모든 이들이 따라 불렀고 상처가 아물었다.

박 대통령은 국민 앞에 서는 걸 피하지 않아도 되는 많은 조건을 갖췄다. 우아한 외모, 차분한 목소리, 또렷또렷한 눈빛··· 그는 도대체 무엇이 두려워 무미건조한 침묵 속에 숨는가.

김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