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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남중국해에 그은 구단선, 역사적 근거 인정 못받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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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중국의 영유권 주장을 부인하는 상설중재재판소(PCA)의 판결로 남중국해 분쟁이 한층 격화될 전망이다. 강제력이 없긴 하지만 수십 년을 끌어온 남중국해 영유권 문제에 관한 국제법정의 사상 첫 판결인 만큼 상징적 의미는 작지 않다. ‘항행의 자유’ 작전을 통해 해·공군 전력을 분쟁 해역에 투입해 온 미국은 이번 판결로 순풍을 만난 셈이다. 작전 강도와 빈도가 한층 높아질 게 뻔하다. 중국은 중국대로 물러설 기세가 아니다. 방공식별구역 설정 등 반격에 나설 것이란 예상이 나온다. 미·중 양측 사이에 예기치 못한 충돌 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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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촬영된 남중국해 난사군도 콰테론 환초. 중국 교통운수부는 지난 10일 이곳을 포함한 남중국해 4개 환초에서 4개의 등대를 가동했다고 발표했다. 아래 사진에 고주파 레이더 시설로 추정되는 안테나들(점선)이 보인다. [사진 CSIS]

판결 내용은 중국의 완패에 가깝다. 가장 핵심인 ‘구단선(九段線)’의 합법성을 부정당했기 때문이다. 중국은 구단선 안에 있는 250여 개의 섬·암초·산호초가 모두 중국 영토이며 350만㎢에 이르는 해역의 80%가 중국 관할이라고 주장해 왔다. 중국이 이 구단선을 자신의 영역 경계선으로 주장하는 근거는 ‘역사적 권원(權原)’이다. 2000여 년 전 한나라 시대 때부터 중국인이 남중국해로 항해하고 섬을 발견해 이름을 지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중국은 “한나라 항해 기록 있다” 주장
국제법정, 고대문헌 증거 채택 안 해
‘항행의 자유’ 외치던 미국 힘 받아
‘핵심 이익’ 침해 중국 강경책 예상

하지만 이런 산발적인 역사 기록은 중국뿐 아니라 남중국해 주변 동남아 국가들의 고문헌에도 등장한다. 국제법정의 판례는 고대 문헌의 기록을 영유권 증거 자료로 인정하지 않는 게 일반적이다. 구단선의 법적 근거를 부인한 이번 판결도 이런 경향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재판소는 남중국해 최대의 해양지형물인 타이핑다오(太平島)까지 해양법상 ‘섬’이 아니어서 배타적 경제수역 을 갖지 못한다고 명기했다. 이렇게 되면 남중국해의 대부분 해역은 공해로 규정되는 셈이어서 항행 자유를 주장하는 미국 주장이 더욱 힘을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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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최근 수년간 국제사회의 비난을 무릅쓰고 건설한 인공섬에 대해서도 아무런 법적 지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해양법상 섬으로 인정되지 않는 암초 주변을 매립하고 그 위에 인공시설을 만들어도 이를 근거로 영해나 EEZ가 생겨나지 않는다는 것은 국제법적으로 이론 없이 통용되는 논리다. 재판소는 중국의 인공섬 건설 행위가 불법임은 물론 환경 파괴 행위란 판단까지 내렸다. 하지만 이번 판결은 국제사법재판소(ICJ)의 판결과 달리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등에 의한 강제 집행 규정이 없다. 따라서 중국이 거부하는 이상 강제성은 없다.

남중국해를 둘러싼 미·중의 전략 격돌은 판결 이후 한층 고조될 전망이다. 남중국해 분쟁은 처음에는 동남아-중국 간의 영유권 분쟁으로 출발했으나 최근 그 성격이 확연히 바뀌었다. 중국은 남중국해 전체에 대한 관할권을 주장하고 절대 침해받을 수 없는 ‘핵심 이익’으로 규정한 데 이어 최근 몇 년 사이에 인공섬 건설 등 실효 지배 강화 행동에 돌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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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시기 ‘아시아로의 회귀(pivot to Asia)’ 정책을 펼친 미국의 입장에선 이런 상황을 좌시할 수 없게 됐다. 석유를 비롯한 전략 물자의 수송로이자 유사시 군사작전 무대가 될 남중국해를 중국의 독점적 영향 아래 내줄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 중국은 “당사국들끼리 대화로 해결할 사항이지 제3국이 끼어들 일이 아니다”며 미국의 개입을 거부하는 입장이다.

이제 관심사는 중국이 판결 이후 어떤 대응책을 내놓느냐로 모아진다. 중국이 이미 자국에 불리한 판결을 예상하고 패소 이후의 대응책을 마련 중이란 보도가 여러 차례 나왔다. 일본 NHK는 “남중국해 상공에 방공식별권을 설정하거나 필리핀이 실효 지배 중인 세컨드 토머스(중국명 런아이자오·仁愛礁)에 대한 강제 점유 시도가 그 방안으로 거론되고 있다”고 전했다. 남중국해 분쟁이 이번 판결로 잠잠해지는 게 아니라 한층 더 파고가 높은 격랑 속으로 빨려들 것이라 예상되는 이유다.

베이징=예영준 특파원 yyjun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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