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4378>제84화 올림픽 반세기<27>불굴의 투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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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개막식에 이어 벌어진 첫경기는 농구 예선리그 대자유중국 경기였다. 현지의 연습경기에서 자유중국을 격파한 전력이 있던 우리팀은 이날 의외로 시종 고전하다 83-76으로 패배하고 말았다.
연습경기에서 우리 팀의 작전을 간파한 자유중국은 1m90cm가 넘른 장신2명을 포스트예 내세워 우리팀을 역습해 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 경기에서 우리 팀의 막내인 김영기는 개인득점 20점으로 눈부신 활약을 보였다.
메달 유망종목인 역도는 대회이틀째부터 벌어져 우리 선수단의 기대를 부풀게 했다. 첫날 밴텀급의 유인호와 김해남은 각각4. 5위를 차지해 순조로운 스타트였다. 유는 용상에서 1백35kg을 들어 세계 기록을 돌파했으나 경기후 계체량에서 아슬아슬하게 1파운드를 초과하는 바람에 세계신기록으로 공인받지 못해 애석하게 됐다.
대회 사흘째엔 역도 라이트급의 김창희가 당당히 동메달을 따내 멜번 하늘에 첫 태극기를 올렸다. 세번째 올림픽 도전에서 메달의 꿈을 이룬 집념의 노장 김창희는 『이 메달을 10년동안 고생하며 뒷바라지 해준 아내에게 선물하겠다』 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세번째의 올림픽 도전, 그리고 선수로는 마지막 기회가 된 이날 경기에서 나는 총계 3백80kg을 들어 5위에 머물렀다. 노병은 이제 물러갈 때가 됐다고 절감했지만 뒤를 이을 후배가 나타나지 않는게 안타까울 뿐이었다.
김창희의 동메달은 우리 올림픽반세기에서 역도의 마지막 메달이 된다. 우리 선수의 기량이 뒤떨어졌다기 보다 세계의 역도 수준이 그만큼 높아진 때문이다.
기본종목인 육상은 매회 올림픽마다 도전했지만 마라톤을 제외하근 세계의 높은 벽에 부닥쳐 좌절을 맛보아야 했다. 마라톤의 이창훈은 4위를 차지했지만 그의 역주는 연도의 관중들을 열광시키기에 충분했다.
마라톤의 명문 양정고교생인 이창훈은 페이스 조절이 잘 안됐던지 21km지점에서는 5위까지 나섰다가 다시 25km쫌에서는 10위권 밖으로 밀려났다. 다시페이스를 찾아 35km지점에서 6위까지 따라붙은 이창훈은 한국팀 응원단의 격려를 받으며 마지막 피치를 올려 37km쯤에서 「인간 기관차」「자토펙」을 따돌리고 이어 골인지점 2km를 남기고는 일본의「가와지마」를 앞질러 당당히 4위로 골인 한 것이다.
이창훈은 다음 올림픽을 기약했으나 3회 아시안 게임에서 우승을 이룩하고 로마 올림픽에선 20위에 머물렀다.
한국의 올림픽 참가 사상 첫금메달의 영광을 안겨주었던 레슬링(1976년 몬트리올대회·양정모). 런던 올림픽때부터 줄곧 올림픽 무대에 도전한 레슬링은 멜번대회에서 이상균 (밴텀급) 의 금메달보다 값진 4위 입선으로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상균은「손가락 없는 레슬러」로 더 잘 알려진 무서운 집념의 선수였다.
레슬링은 상대방의 몸을 감아 매트에 누르는 경기다. 따라서 손가락의 힘이 경기 능력에 큰 영향을 주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데 이상균은 왼손 엄지에서 중지까지 손가락 3개가 없다. 문관으로 군에 근무하던 1951년 5월 수류탄을 다루다 터지는 바람에 손가락을 잃어버린 것이다. 1947년부터 레슬링을 연마해온 이상균은 사고 후에도『손가락은 태어날 때부터 없었던것으로 생각하자』며 이를 악물고 「팔 빗지르기」 등 자신의 주특기를 개발, 세계 무대까지 나선 것이다.
이상균은 멜번대회 이후 한국체육관의 사범으로 후배 양성에 힘써 동경올림픽 은메달리스트인 장창선등을 길러냈고, 71년부터 한국체육관의 관장으로 매트를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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