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김진국 칼럼

개헌의 조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김진국
김진국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기사 이미지

김진국
대기자

노무현 전 대통령은 거침없는 말투로 자주 구설에 올랐다. ‘대못’도 그중 하나다. 차기 대통령 선거가 한창이던 2007년 9월 전국 10개 혁신도시 가운데 가장 먼저 서귀포에서 기공식을 하며 그가 한 말이다. “어떤 정부도 흔들지 못하게 제 임기 안에 말뚝을 박고 대못을 박아 두려는 것입니다.”

노 전 대통령에겐 소수파 콤플렉스가 보인다. 어쩌다 정권은 잡았지만 다시 비슷한 정부가 들어서기는 어렵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정권이 바뀌더라도 정책을 뒤집지 못하도록 여기저기 ‘대못’을 박아놓으려 했다.

그중 하나가 개헌이다. 그는 임기 말 ‘원 포인트 개헌’을 제안했다. 4년 중임제로 대통령 임기만 고치자고 했다. 모든 권력이 집중된 제왕적 대통령이지만 사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집권하면 인사하고, 업무 파악하는 데 1년이 뚝딱 지나간다. 마지막 1년은 다음 대통령 선거 하느라 보이지도 않는다.

사실 대통령 선거가 끝나면 바로 다음 대통령 선거전이 시작된다. 대통령이 모든 걸 하니 경쟁 정치인이 달리 할 일이 없다. 현 대통령의 잘못을 끄집어내 성토하는 것으로 정권 교체 필요성을 부각하는 일에 매달리게 된다. 더구나 노 전 대통령은 임기 초반을 여소야대(與小野大) 국회와 보냈다. 탄핵안이 가결돼 권한이 정지되기도 했다.

기사 이미지

임기 말 현상도 여지없이 반복된다. 측근 비리로 힘이 빠진 대통령이 사과하는 건 87년 헌법 체제의 빠지지 않는 과정이다. 노 전 대통령은 일하려면 여대야소(與大野小)가 돼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 두 가지 선거를 같이 하면 ‘단점(單占)’ 정부가 될 가능성이 커진다. 또 일을 펼쳐만 놓지 않고 결과까지 보려면 4년 중임은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다고 해결될까. 언제까지 인기투표로 한 사람에게 모든 권력을 몰아줘야 하나. 노 전 대통령 말처럼 ‘세종시’ 같은 ‘재미 볼’ 정책 하나 잘 내밀면 국정을 모두 맡기는…. 검증을 받으며 정치인이 만들어지기보다 트럼프처럼 깜짝 후보가 나올 가능성이 크다. 정치 혐오가 심할수록 때묻지 않은 신인이 호감을 준다. 그러고는 평가받을 기회도 없이 5년 뒤면 떠나간다. 대통령 무책임제다.

가장 염려되는 것은 정책의 일관성 문제다. 지금이야말로 100년 앞 미래에 대한 설계가 필요한 때다. 그렇지만 87년 이후 어떤 대통령도 전임 대통령의 정책을 제대로 이어가는 걸 본 적이 없다. 정권교체뿐이 아니다. 같은 당 사람끼리도 마찬가지다. 김대중·노무현 정부도 햇볕정책을 놓고 갈등을 빚었다. 집권당을 해체했다.

이명박 정부의 녹색성장은 사라졌다. 노무현 정부 사람은 써도 이명박 정부 사람은 쓰지 않는다. 그러니 공무원이 복지부동(伏地不動)이다. 요직을 차지할 수 있는 기회가 아니라면 납작 엎드려 다음 정부를 기다린다. 어설프게 움직였다가는 다음 정부에서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정책은 한 방이다. 그것으로 집권만 하면 된다. ‘브렉시트’처럼 나중에 거짓으로 밝혀져도 5년은 그냥 간다. 집단 지성을 모으는 게 아니라 대통령 한 사람의 의지에 매달린다. 5년 내 성과가 나와야 한다. 열심히 일해 다음 대통령이 열매를 따먹는 건 억울하다. 4대강을 비롯해 수없이 많은 정책을 대통령 임기 내에 끝내기 위해 서둘렀다. 대한민국이 5년짜리가 돼 간다.

한국 정치의 최대 변수는 역시 지역주의다. 김대중·김종필(DJP)연합 정권이나 민주당의 데릴사위론을 이해하는 데 필수요소다. 노무현·문재인·안철수의 지지기반이 무언가. 대구·경북(TK)-충청 연대에 바탕을 둔 반기문 대망론도 그런 셈법이다.

지역정서를 부추기고, 그런 정서에 기대 손을 잡고, 정권을 만드는 그런 정치가 반복될 수밖에 없다. 큰 지역별 유권자 수는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지역주의가 희석된 소지역에서 인물을 보고 뽑고, 그 대표들이 이념과 정책에 따라 제휴해 정권을 만드는 게 한 가지 방법이다. 정책의 일관성, 지역주의 완화만 이끌어낼 수 있어도 87년 체제를 손질할 가치로 충분하다. 기왕이면 선거제도 개편과 행정구역 개편까지.

문제는 국회 불신이다. 가뜩이나 국회의원을 못 믿는데 권력을 더 안겨줄 수 있느냐다. 내각제나 이원집정제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이유다. ‘김영란법’을 만든다면서 국회의원만 빼버리는 의원들을 어떻게 믿겠나. 20대 국회가 시작되자마자 의원 특권 내려놓기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김영란법도 고치겠다고 한다. 정말 다 버리지 않으면 국민 신뢰를 얻기 어렵다.

면책특권은 제왕적 대통령을 견제하는 데 필요하다. 그러나 내각제라면 다시 생각할 문제다. 검찰과 경찰, 윤리위원회뿐이 아니다. 국회에 권력을 더 주려면 의원 비리를 단속할 강력한 장치들을 만들어야 한다.

김진국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