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김진국 칼럼

명분 포기한 막장 정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김진국
김진국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기사 이미지

김진국
대기자

4·13 총선을 치른 지 두 달이 흘렀다. 이번 선거는 거의 혁명이었다. 제1당이 바뀌고, 양당 체제는 3당 체제로 뒤집혔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결과다. 이것만 봐도 가장 반성해야 할 건 새누리당이다. 그런데 지금 새누리당은 전혀 다른 모습이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분위기다.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할 때부터 알아봤다. 계파로 선거를 망쳐놓고 또다시 계파 타령이었다. 곡절 끝에 새로 임명한 김희옥 비대위원장은 “국민의 눈높이와 뜻을 받들어 혁신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8월 9일 전당대회를 열어 새 지도부를 뽑기로 했지만 그때까지 뭐가 나오리라 기대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냥 비대위를 만든 것으로 반성 모드를 끝낸 것이다.

10일 의원 워크숍을 보면 알 수 있다. 하루 만에 건성건성 끝냈다. 가슴에서 우러난 반성은 없었다. 무엇이 잘못됐고,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 진지하게 논의하는 시간은 준비조차 하지 않았다. 멍하니 특강을 듣고, 북한 체제를 비판하는 영화를 보고…. 기껏 열심히 대화를 나눈 건 상임위원장과 상임위 배정 문제였다. 통과의례처럼 워크숍이 끝난 뒤 “계파 청산”을 외치며 폭탄주를 돌렸다. 진심보다 장난기가 더 느껴진다. 국민의 심판이 조롱당한 기분이다.

이제는 상임위원장까지 나눠 먹겠다고 한다. 끝장을 보여준다. 아직은 ‘국민의 눈높이에서 개혁하겠다’고 다짐한 비상 체제 아닌가. 정무위원장은 이진복·김용태 의원이 차례로 1년씩 맡고, 김성태 의원이 후반기 2년을 하기로 했다. 법사위원장은 권성동·여상규·홍일표 의원이 역시 1-1-2년씩 쪼갰다. 미방위는 신상진·조원진 의원이, 국방위는 김영우·김학용 의원이, 정보위는 이철우·강석호 의원이 1년씩 맡기로 했다.

기사 이미지

정치는 명분이다. 정치판이 탐욕을 절제하게 만드는 장치다. 명분을 잃어버리면 막장 정치, 패도(覇道)가 된다. 누구나 잘못을 저지른다. 중요한 건 그 뒤의 태도다. 지적을 받으면 잘못을 고치고 더 나아지는 게 보통 사람이다. 그런데 가끔은 ‘나는 원래 그런 인간이야’ 하며 막가는 경우가 있다. 새누리당이 꼭 그 꼴이다.

나눠 먹기 하는 명분이 뭔가. 억지 명분이라도 내세우는 게 국민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정진석 원내대표는 3선 의원은 많은데 위원장 자리는 줄어들었다고 한다. 경선을 하면 후유증이 있다고도 한다. 의원들의 이권 나누기다. 거기에 ‘국민’은 끼어들 틈이 없다. 정 원내대표는 야당도 과거 그런 적이 있다고 했다. 야당을 물고 들어가는 게 잘못된 일이라는 건 알고 있다는 말이다. 잘못된 전례를 찾아내 따라 하는 건 개혁이 아니다. 더구나 야당은 정리했는데 집권당이 노력조차 않은 건 실망이다.

국민의 입장에서는 일을 잘하는 게 중요하다. 거기에 필요한 건 전문성이다. 20대 국회에서 초선 의원은 132명. 전체 의원(300명)의 44%다. 초보운전이 절반 가까이 된다는 말이다. 그런 국회를 주도해 끌고 가야 할 사람이 상임위원장이다. 국회의원의 전문성이 떨어지면 관료들에게 휘둘릴 수밖에 없다. 전문성이 떨어지니 고함을 지른다. 본질을 모르니 사소한 일로 트집을 잡아 존재감을 보이려 한다. 이 때문에 국민들의 불신을 받았다. 그런데 다시 그 길을 가는 것이다.

국회 상임위원과 위원장의 임기를 2년으로 정해놓은 건 전문성을 지키려는 장치다. 그런데 지역구 민원 위주로 인기 상임위를 돌아가며 맡는 게 관행처럼 됐다. 위원장을 1년 맡아 봐야 일을 파악하기도 전에 자리를 옮겨야 한다. 장기적인 정책은 들여다볼 틈도 없다. 어떤 의원은 “위원장이나 간사가 돼야 공무원들에게 말이 먹힌다”고 한다. 전문성이 아닌 자리로 관료들을 다잡겠다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할 수 있는 건 민원 처리뿐이다.

더구나 일부는 같은 상임위에서 교대로 맡는 것도 아니다. 국방위원장을 나눠 맡기로 한 김학용 의원은 미방위원장을 지원했었다고 한다. 강석호 의원도 정보위원장을 지원한 게 아니다. 1년 뒤 미방위원장을 맡기로 한 조원진 의원은 환노위에, 2년 뒤 정무위원장을 맡기로 한 김성태 의원은 국토교통위에 배정됐다. 전문성과는 관계없다는 말이다.

정세균 국회의장은 개원사에서 개헌 문제를 꺼냈다. 헌법학자·정치학자들 가운데는 내각제나 이원집정부제 같은 분권형 개헌을 주장하는 사람이 다수다. 그런데도 국민 여론은 대통령 중심제에 쏠려 있다. 장관 자리까지 나눠 먹지 않을까 걱정하기 때문이다.

국회의 전문성을 위해 비례대표를 늘려야 한다고 한다. 그보다 급한 건 지역구 의원들의 전문성을 높이는 일이다. 능력이 있다면 위원장도 계속 맡기는 게 옳다. 그게 개혁이다. 더 이상 막가는 정치는 피해야 한다.

김진국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