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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방위비’도 분담해야 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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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민근 기자 중앙일보 경제산업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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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민근
경제부문 차장

지난 16일 주한 미국대사관에선 이례적인 백브리핑(언론 대상 비공식 현안 설명회)이 열렸다. 계기는 이달 초 마크 리퍼트 대사가 한 강연이었다. 그는 이 자리에서 법률시장 개방 확대 등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완전한 이행’과 규제 완화를 요구했다. 발언 강도도 셌지만 시점도 미묘했다. 당장 미국 대선을 앞두고 ‘통상압박’이 본격화했다는 해석이 나오자 대사관 측이 진화에 나선 것이었다.

이 자리에서 미 정부 관계자는 “대사의 강연은 압박이 아니라 협력을 강조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그가 부연 설명한 ‘협력’의 의미는 간단치 않았다. “개방 확대와 규제 완화는 미국은 물론 한국에도 이롭다. 양국이 FTA를 체결한 것은 열린 시장, 법치주의, 투명성 등의 가치를 공유했기 때문이 아닌가.” 외교적 수사를 직설적 표현으로 바꾸면 이런 의미가 될 것이다. ‘한국과 미국은 자유무역이란 한배를 탔다. 그러니 무임승차할 생각은 접어라.’

여기까지는 원론이라 치고, 문제는 그다음이다. 그는 “양국이 공유한 가치를 역내를 넘어 전 세계에 확산해야 한다”며 ‘협력’의 범주를 넓혔다. 미 행정부가 한·미 FTA를 단순한 양자협정이 아닌 자유무역의 유효성을 대내외에 입증할 ‘리트머스 시험지’로 보고 있다는 의미다.

그간 미국은 자유무역과 탈(脫)규제를 축으로 한 ‘워싱턴 컨센서스’를 통해 세계 경제질서를 주도해 왔다. 한·미 FTA는 그 산물이다. 최근에는 확장판이자 ‘메가 FTA’인 환태평양동반자협정(TPP)의 비준도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시도는 최근 나라 안팎에서 역풍을 맞고 있다. 안에선 공화당 대선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를 중심으로 보호무역주의적 주장을 제기하고 있고, 밖에선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로 상징되는 반(反)세계화의 조류가 일고 있다.

다급해진 미 행정부가 택한 전략은 ‘정면돌파’로 보인다. 중국에는 통상전쟁까지 불사한 거친 압박에 나서고, 한국과는 시장 개방의 속도와 수준을 빠르게 높여 ‘FTA 무용론’을 잠재우겠다는 것이다. 리퍼트 대사의 강연은 그런 면에서 ‘워싱턴 컨센서스’의 수혜국인 한국에 일종의 ‘경제적 방위비’ 분담을 요구한 것과 같다.

부담은 이미 현실화하고 있다. 지난주 이동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은 학계와 언론에 농업 관련 통상정책을 설명하는 자리에서 한국이 뒤늦게 가입을 검토하고 있는 TPP의 ‘참가비’가 만만치 않을 것이란 전망을 내놓았다. “(가입 조건으로) 높은 수준의 농산물 시장 추가 개방 요구가 있을 것”이라는 얘기다. 한·미 FTA 체결 당시 큰 홍역을 치렀던 농식품부로선 다시 큰 숙제를 떠안은 것이다. 통상법 전문가인 최원목 이화여대 교수는 “당장 한·미 FTA부터 업그레이드하라는 요구가 나올 것”이라고 내다봤다. 수출로 먹고사는 한국이 처한 현실은 이처럼 녹록지 않다. ‘설마 트럼프가 당선되겠느냐’는 안일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조 민 근
경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