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철학 없는 재탕·짜깁기 조치로 경제 살릴 수 있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0면

정부가 어제 ‘하반기 경제정책 방향’을 내놓았다. 올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2.8%로 낮추고, 10조원 규모의 추가경정예산을 포함해 20조원가량의 재정을 더 투입하기로 했다. 노후 경유차 폐차 지원과 고효율 가전제품에 대한 세금 환급, 과열된 부동산시장을 식히기 위한 중도금 대출 규제 강화 등도 추진된다. 유일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대외여건 악화와 구조조정 영향을 최소화하고 일자리를 지키는 데 초점을 뒀다”고 설명했다.

추경의 필요성은 어느 정도 인정할 수 있다. 세계은행(WB)은 지난 7일 올 세계경제 성장률 전망치를 2.9%에서 2.4%로 크게 낮췄다. 저유가와 중국 경기, 미국의 금리 인상 같은 변수가 서로 맞물려 경기 회복이 지연되고 있다. 여기에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브렉시트)라는 변수까지 추가됐다. 국내에선 조선·해운 구조조정으로 대량 실업과 경기 침체 우려가 가중되고 있다.

하지만 너무 소극적이고 방어적이다. 추경 재원 10조원은 올해 정부 예상보다 더 걷힐 것으로 예상되는 세금에서 나온다. 적자재정을 감수하고 국채를 발행해 마련하는 돈이 아니다. 경기부양을 위해 마중물을 붓는 적극성과는 거리가 멀다. 과감하지도, 충분하지도 않은 추경의 효과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우리 경제의 근본 문제인 양극화와 저출산·고령화에 대한 고민과 해법도 그리 눈에 띄지 않는다. 이를 해결할 핵심 정책인 주거·청년·일자리 대책은 재탕과 짜깁기로 메워졌다. 공공주택 공급을 크게 늘리는 근본 처방 대신 연말정산에서 월세세액공제 범위를 확대하는 선에 그쳤다. 청년·여성 취업 지원금 확대나 멘토링 제공 등 늘 보던 대책들도 빠지지 않았다. 국가의 미래에 대한 철학이나 성장·분배의 선순환을 위한 일관된 전략 대신 임기응변과 단기처방만 나열됐다.

추경의 습관화도 경계할 일이다. 이제 박근혜 정부 4년간 2014년만 빼고 매년 추경을 편성하게 됐다. 정부의 경기 예측과 정책 운영 능력에 대한 불신도 그만큼 커졌다. 그럼에도 경제체질이 튼실해지고 성장동력이 확충됐다는 평가는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구조적 저성장이 굳어졌다는 우려가 커졌을 뿐이다. 경제정책의 각론이 아니라 방향과 전략을 잘못 잡고 있는 게 아니냐는 지적까지 나온다. 두 달 전까지 추경에 대해 “불필요하다, 안 된다”던 유일호 부총리도 급작스레 “시급하다”고 입장을 바꿨다.

이번 추경은 이런 우려를 해소하는 계기가 돼야 한다. 추경을 처음 제기한 건 야당이다. 추경 효과를 높이려면 가능한 한 정치권이 신속하게 처리해야 한다. 구조조정과 일자리 추경이라는 취지에서 벗어나는 선심성 복지나 지역구 사업 끼워넣기는 삼갈 일이다. 저성장과 구조조정에다 브렉시트가 몰고 온 나라 안팎의 정치·경제적 불확실성이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크다. 정권이나 정파의 이해로 접근할 일이 아니다. 추경에서부터 경제 협치가 시작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