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브렉시트 직전까지 “브리메인”…장밋빛 전망만 내놓은 애널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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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호
경제부문 기자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브렉시트) 국민투표 개표가 진행되던 24일 오전. 국내 증권사 리서치센터가 공개한 보고서엔 ‘브리메인(Bremain)’이란 단어가 제목과 본문에 자주 보였다. 브리메인은 ‘영국이 EU에 남는다(Britain+remain)’ 는 의미의 신조어다. 영국의 EU 잔류를 가정하고 이후 시장 상황을 전망하는 보고서가 많았다.

“적극 투자” 몇시간 뒤 “급락 불가피”
뒷북 행태, 사이드카 한 원인 제공
증권사 “경험해보지 못한 일” 변명

개표 당일 아침 다수의 증권사 애널리스트는 “영국의 EU 잔류가 확정되면 시장의 불확실성이 사라져 국내 증시가 반등할 것”이란 예상을 내놨다. 17일엔 브렉시트 투표 결과가 나오기 전에 주식 투자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A증권사는 “브렉시트 국민투표 이후 주식 비중을 확대하면 늦은 대응”이라며 “단계적으로 주식비중을 늘려가는 게 바람직하다”는 조언을 내놨다.

브렉시트 개표일 주요 증권사 리포트 제목

“브리메인 이후”
“브리메인과 위험자산 기대”
“높아지는 영국의 EU잔류 기대감”
“브렉시트 투표 결과, 잔류 가능성에 무게”
“한국채권시장 전망-브리메인 결정에 하락할 것”
“ 한국외환시장 전망-달러/원 환율 영국 EU잔류 결정
에 하락세 보일 것”
“영국 잔류 예측 우세, 외환시장 변동성 확대 예상”
“신흥국 증시, 브리메인 가능성에 베팅하며 상승”

그러나 브리메인 리포트가 공개된 지 몇 시간 뒤인 24일 낮 12시부터 개표 결과는 브렉시트로 급격히 기울었다. 충격파는 국내 증시를 뒤덮었다. 2000선을 회복하며 거래를 시작했던 코스피 지수는 브렉시트로 투표결과가 확정된 오후 3시 3.09% 하락라며 4년만에 가장 큰 폭으로 떨어졌다. 코스닥 시장에선 사이드카(매매거래 5분간 정지)까지 발동됐다.

증권가는 분주해졌다. 이날 점심 약속을 취소하고 밥을 시켜먹거나 끼니를 거른 채 사무실을 지킨 애널리스트도 적지 않았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투자자의 항의성 문의 전화에 시달리는 애널리스트가 많았다”고 전했다.

증권사 리서치센터들은 회의를 열고 향후 증시 전망과 투자전략을 긴급히 논의했다. 회의 후 본지를 비롯한 언론사들이 브렉시트 이후 전망을 묻자 대부분 당분간 코스피의 급락이 불가피하다는 전망을 내놨다.

일부 증권사에선 최악의 경우 코스피 지수가 1800선 초반까지 하락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오전까지 “브리메인 이후 위험자산에 투자하라” 는 의견에서 급변했다. 증권사의 고질적 관행인 ‘뒷북 전망’이 또 나타난 것이다.

증권사도 할 말은 있다. 익명을 원한 중형 증권사 연구원은 “브렉시트 같은 사건은 역사적으로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라 예측이 어렵다”며 “세계 금융시장이 EU 잔류를 기대하는 움직임을 보이는 가운데 탈퇴 전망을 하긴 힘들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연구원은 “단기적으론 브렉시트 충격이 크겠지만 EU와 미국이 신속히 정책 대응에 나서면 증시는 빠르게 회복할 것”이라며 “아직 예측이 틀렸다고 보긴 이르다”고 반박했다.

하지만 투표 직전까지 영국 현지 여론조사에선 EU 잔류가 탈퇴 의견보다 앞섰지만 그 격차는 매우 작았다. 조사기관에 따라선 탈퇴가 잔류를 앞선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도 낙관론 일색의 보고서를 냈다. 그러다 예상이 빗나가자 이번엔 극단적인 비관론으로 보고서를 도배했다. 국제적인 외부 충격이 있을 때마다 내놨던 냉탕·온탕 전망이 이번에도 되풀이된 셈이다.

한 소형 증권사 리서치센터장은 “애널리스트는 좋은 종목을 추천해 고객이 주식을 사도록 하는 데 익숙해 보수적 전망이 익숙지 않다”며 “코스피 지수나 기업 신용평가 분야에선 리스크 관리가 중요해지면서 많이 개선됐지만 아직 부족하다”고 말했다.

최근 증권사는 구조조정에 들어간 조선·해운 회사의 부실을 지적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저금리 시대를 맞아 투자에 대한 중요성은 커지고 있다.

투자업계는 고객의 신뢰를 먹고 산다. 사건이 터질 때마다 호들갑을 떠는 냉탕·온탕 전망 관행이 바뀌지 않는다면 금융투자업계의 미래는 밝지 않다.

이승호 경제부문 기자 wonderm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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