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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사람이 새 사람으로 태어났다고 하네요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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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7일 화요일 오후 외래진료가 거의 끝나가는 시간, 인상 좋은 훈남이 진료실로 들어온다.

어? 이 환자는 내일(4월8일) 수술이 잡혀 있는데 필자가 이전에 진찰을 한적이 없다.

아마도 지난번 필자가 독감으로 환자를 보지 못할 때에 젊은 김교수가 대신 보고 수술을 권유해서 입원하게 된 모양이다.

집이 지방이다 보니 필자를 만나기 위해 다시 먼길을 올 필요 없이 수술전날 입원할 때 필자를 만나도 된다고 했나보다.

그래도 그렇지, 자기를 수술할 의사 얼굴도 한 번 안 보고 수술을 결정하고 입원까지 하다니… 신뢰를 해도 너무 신뢰를 해준다.

"어째, 바로 수술받기로 결정했네요?"

"예, 저는 교수님 책보고, 카페 글보고, 진료일지 보고, 교수님 믿고 수술받기로 했습니다"

필자는 평생 이런 환자는 처음 본다.

지난번 젊은 김교수가 지방병원에서 가지고 온 초음파영상을 볼 때는 1.0cm 남짓한 암덩어리가 왼쪽 갑상선 날개에 위치하고 있었다.

사이즈가 1.0cm라 크게 걱정할 정도는 아니지만 위치가 소위 "마의 삼각지점" 근처에 있어 그냥 두면 곤란해질 것 같아 수술을 권유했던 모양이다.

그참, 요즘같이 "갑상선암을 꼭 수술해야 하나?"하고 의심하는 사람이 많은 세태에 이런 환자가 다 있다니…

근데 암이 어디까지 퍼졌나를 보기 위한 초음파스테이징(ultrasonographic staging)과 CT스캔을 보니, 어어라?,

지난번 지방병원에서 가지고 온 초음파영상과 완전 다르다.

왼쪽 날개에 있는 암덩어리의 사이즈는 1.08cm으로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는데

왼쪽 중앙경부 림프절과 왼쪽 Level III와 IV 옆목 림프절들이 내경정맥을 따라 큼직큼직하게 전이가 일어나 있지 않은가.

"이거 같은 환자 영상 맞아?" 할 정도로 다르게 보이는 것이다.

환자에게 있는 그대로 보이는 그대로 설명을 하고 수술에 대하여 얘기 해주는데, 이 환자 좀 보소, 처음 한 순간 흠칫 놀라는 것 같더니 이내 표정을 바꾸어 웃는 얼굴로 "예, 예, 저는 교수님이 하라는대로 하겠습니다" 한다.

햐~~, 이런 환자일수록 정말 더 잘 치료가 되어야 할텐데 생각하면서 한마디 날려준다.

"잘 해줄께요, 좀 암이 진행되었지만… 뭐 이런 정도 퍼진 환자를 하도 많이 봐 와서...어렵지 않게 될 것입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셔…"

병실로 올라가니 환자의 와이프가 와 있다. 근데 이 와이프 인상이 신랑과 너무 비슷한 분위기다. 신랑과 다를바가 없이 웃는 상이다.

"여기 두 분이 나란히 서 보셔. 흠 ~, 많이 닮았네. 오누이 같은데...부부가 닮으면 잘 산다는데 좋아, 좋아.."

드디어 오늘(4월8일)이 수술 D-day 날이다. 목에 절개선 디자인을 하면서 환자에게 농담을 한다.

"와이프가 세아들 맘이라고?"

"네.네, 제까지 하면 네 아들이 되지요. 제가 제일 큰아들이고요"

"맞아, 맞아, 이번에 낫고 나면 와이프에게 잘 해주셔, 나도 이 나이까지 망구님한테 야단 맞으면서 살고 있지. 와이프에게 야단 맞고 살 때가 좋은 거요, 흐흐"

수술은 일사천리로 잘 진행된다. 가장 우려하던 왼쪽 마의 삼각지점에 있는 갑상선암도 성대신경과 무리없이 잘 분리되고,

중앙 경부로 전이된 림프절들과 왼쪽 내경정맥을 따라 포진하고 있던 전이 림프절들도 어렵지 않게 제거된다.

왼쪽 흉관(thoracic duct)근처의 전이 림프절을 분리할 때 약간의 어려움이 있었지만 이것도 무사히 통과한다.

왼쪽 흉관이 열리면 유미루 누출(chyle fistula)이 생겨 환자가 엄청 고생하고 퇴원이 지연되기 때문에 이 부위를 수술할 때에는 더욱 신경이 쓰이는 것이다.

드디어 수술이 무사히 끝나고 병실에서 환자와 환자의 와이프를 만난다.

한 눈에 봐도 수술에 따른 합병증이 보이지 않는다. 목소리 좋고, 배액관에 유미루나 출혈도 없고,

오너증후군으로 오는 눈꺼풀 처짐도 없고, 손발저림도 없고 일단 수술은 만족스럽게 된 것 같다.

"수술 잘 됐어요. 잘 회복 할 겁니다. 세 아들 맘이 아니라 네 아들 맘이 되었군요,"

이 말에 환자 와이프가 눈에 눈물이 가득차서 말한다.

"고맙습니다. 교수님 저 사람이 새 사람으로 태어났다고 하네요, 정말 고맙습니다. 교수님"

역시 부부는 이런 것이다. 특히 이 젊은 부부는 참 보기 좋다. 앞으로도 행복하게 잘 살 것 같다.

☞박정수 교수는…

세브란스병원 외과학 교실 조교수로 근무하다 미국 양대 암 전문 병원인 MD 앤드슨 암병원과 뉴욕의 슬론 케터링 암센터에서 갑상선암을 포함한 두경부암에 대한 연수를 받고 1982년 말에 귀국했다. 국내 최초 갑상선암 전문 외과의사로 수많은 연구논문을 발표했고 초대 갑상선학회 회장으로 선출돼 학술 발전의 토대를 마련한 바 있다. 대한두경부종양학회장, 대한외과학회 이사장, 아시아내분비외과학회장을 역임한 바 있으며 국내 갑상선암수술을 가장 많이 한 교수로 알려져 있다. 현재 퇴직 후에도 강남세브란스병원에서 주당 20여건의 수술을 집도하고 있으며 후진 양성에도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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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수 기자 sohopeacock@naver.com <저작권자 ⓒ 중앙일보헬스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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