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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신사의 길을가다<26>한일국교정상화 20년맞아 다시찾아본 문명의 젖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검문소로 악명높던 아라이세끼쇼(신거관소)사적지를 뒤로하고 시즈오까행 완행열차를 탔다.
열차는 역마다 몇명씩의 승객을 갈아태우며 옛날 통신사 일행이 걸었던 도오까이도 남쪽을 거의 평행으로 달렸다. 일행이 묵거나 쉬어간 곳에서는 열차도 빠짐없이 정거했다.
역마다 내려 옛자취를 더듬어보고 싶었으나 바쁜 일정에 쫓겨 그대로 지나칠수 밖에 없는것이 아쉬웠다.
아라이마찌 (신거정) 에서 시즈오까에 이르는 1백여km의 구간은 관서의 중심지 오오사까와 관동의 중심지 동경의 중간에 해당하는 곳이다. 말의 액선트도 이 지역을 흐르는 오오이가와 (대정천)를 경계로 관서계와 관동계가 다르다.
기후가 따뜻하고 비가 적당히 내려 일본에서도 가장 살기 좋은 곳으로 꼽힌다.
차창 밖으로는 푸른논과 차밭(다원) , 밀감과수원이 차례로 지나갔다. 높은 산 중턱까지 차밭이나 과수원을 일구어 놓은것이 자주 눈에 띈다.

<밤새 허리띠 없어져 호행일인 시치미 떼>
아라이세끼쇼에서 가마와 말을 갈아타고 하마마쓰로 들어가 1박한 신유한공 일행은 다음달 덴류우가와에 임시로 놓인 대소 2개의 다리를 건너 미쓰께(견부·지금의 반전시)에서 점심을 들고 저녁무렵 가께가와(괘천)의 사관에 도착한다.
덴류우가와에 가설한 다리는 작은것은 판자를 놓아 만든 것이었으나 큰것은 배를 띄워 만든 주교였다. 일본측 기록에는 이때의 주교를 만들기 위해 배53척을 띄운 것으로 돼있다.
그러나 철교밑으로 내려다 보이는 지금의 덴류우가와는 수량이적어 배53척을 띄웠다는 얘기가 믿어지지 않는다.
가께가와의 숙사는 덴류우사였다. 신공일행을 맞기위해 이해 (1719년) 에 방2칸을 증축해 놓고 있었다.
이곳에서 신공은 조그마한 해프닝을 겪는다. 밤에 고국에 두고온 가족들과 만나 웃으며 기뻐하는 꿈을 꾸고 아침에 일어나보니 허리띠가 없어졌다. 대모의 장도와 은고리를 달아둔 푸른 당대 (당대)로 평소 소중하게 여기던 물건이었다.
호행하던 왜의 관리들을 시켜 찾아보게 했으나 왁자지껄 떠들기만하고 찾아내지를 못했다. 호행관이란 자는 뻔뻔스럽게 『이미 잃어버린 물건이니 단념하고 에도 사람들의 귀에 들어가지나 않도록 해달라』고 부탁까지한다.
신공은 시중들던 왜인의 소행이란 심증이 들었으나 만약 에도의 장군에게 이 사실이 알려지면 호행하던 여러 관리들이 화를 입을것을 생각하고 찾을것을 포기, 그대로 길을 떠난다.

<약탈해간 금속활자 덕천가강 애지중지>
이날의 일정은 가나야에서 점심을 들고 오오이내를 건너 후지에다까지 가는 70리 길이었다.
오오이내는 도오까이도를 따라 에도로 왕래하는 여행객들에게 가장 건너기 어려운 천연의 난소(난소)였다.
물이 깊지는 않으나 흐름이 빨라 배를 이용할 수가 없고 에도방위라는 전략적 이유때문에 다리를 놓는 것도 금지돼 있었다. 서민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걸어서 건너거나 인부를 사서 무등을 타고 건너야했다.
물론 돈이 있는 사람들은 4∼6명이 메는 들것을 탈수가 있었고 봉건영주나 공경들은 가마에 탄채 20명이 메는 들것위에 높이 올라앉아 건넜으나 수량이 조금만 늘어도 도항이 불가능했다.
통신사 일행도 인부가 메는것을 타고 건넜다.
그러나 일행이 건널때는 안전도를 높이기 위해 많은 인부를 내의 상류에 빽빽이 늘어세워 급한 물살을 죽이도록 했다. 사람으로 보를 쌀은 셈이다. 물을 막는데 동원되는 이들 인부를 일본측은 미즈기리 (수절) 라고 불렀다.
신공 일행이 오오이내를 건널때의 모습을 『해유녹』 에서 찾아보자.
「강은 세갈래가 되어 흐르는데 물은 겨우 무릎을 넘지만 물살이 빠르기가 마치 화살과 같다. 주교를 놓을수가 없으므로 사면에 난간이 있는 흰 나무로 만든 들것을 10여개나 만들어서 용정 (용정·국서를 넣은 가마) 을 봉안하거나 교자를 싣는다. 들것하나를 수십명이 메는데 일행의 말과 행리를 붙들고 건너는 자가 많아 천여명에 이른다.
왜의 관리가 강 위에서 독려하는 소리가 요란하다. 신묘사행때는 이 강을 건너려다 홍수로 물이 불어 이틀이나 머물며 지체했다한다.」
후지에다의 숙사는 도오운사였다. 여기서는 글을 구하러 오는 사람도 없어 신공은 오랜만에 한가하게 쉴수있었다.
다음날 일행은 슌뿌의 호오따이사에서 점심을 들게된다.
슌뿌성은 「도꾸가와·이에야스가 어릴때 인질로 잡혀 있던 곳인 동시에 만년을 보낸 곳이기도 하다. 지금은 시즈오까라고 불리며 시즈오까현의 중심도시다.
슌뿌에 은거하면서 그는 한반도에서 새로 도입(?)된 금속활자 인쇄라는 첨단기술을 써서 책을 출판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일본에 금속활자가 처음 전해진 것은 임진왜란때 였다. 서울을 침공한 왜군은 방대한 서적과 함께 당시 남산밑에 있던 활자주자소의 금속활자와 인쇄기구를 몽땅 약탈하여 1593년 일본으로 후송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고종21년(1234)부터 금속활자를 쓰기 시작해서 조선조때는 거의 모든 서적이 금속활자에 의해 인쇄되고있었으나 일본에서는 임진왜란을 일으킬때까지도 목판인쇄뿐이었다.
서울에서 약탈해온 금속활자는 이들이 처음 손에 넣어보는 귀중한 새기술이었다.
왜란의 원흉「도요또미·히데요시」는 이 값진 전리품을 당시의 「고요오제이」천황에게 바쳤고 학문을 좋아하던 「고요오제이」천황은 곧 이들 활자로 책을 인쇄하도록 했다. 이때에 만들어진 「고문효경」이란 책은 일본에서 금속활자를 쓴 활판인쇄의 효시가 됐다.
「도요또미」 정권이 무너진후 정권을 잡은 「도꾸가와·이에야스」는 만년에 슌뿌성에 은거하면서 한일관계의 정상화에 애를 쓰는 한편 슌뿌성안의 산노마루에 금속활자 인쇄시설을 갖추어 놓고 『대장일람』『군서치요』라는 책을 출판하도록했다.
이때 쓰여진 활자가 서울에서 약탈해간 활자인지, 아니면 이를 모방해서 일본에서 새로 주조한 것인지는 학자들간에 논란이 있어 확실히 알수없으나 한반도에서 건너간 최신의 인쇄기술에 「도꾸가와」가 직접 큰 관심을 기울인것만은 틀림없다.
이때 인쇄를 담당했던 기술자는 임오관이라는 한국사람이었다. 전쟁때 금속활자와 함께 잡혀간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러려나 일본에서의 금속활자 인쇄는 끝내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슌뿌판으로 끝나고 만다. 그 이후는 다시 목판 활자가 주류를 이루어 에도말기까지 계속됐다.

<시즈오까성 헐리고 그터엔 공원들어서>
일본이 금속활자의 도입·정착에 실패한 이유는 인쇄기술이 미치지 못했기 때문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약탈이라는 방법으로 하드웨어를 손에 넣었으나 이를 움직일 소프트웨어가 없었다는 얘기다. 수성 잉크를 쓰는 목판인쇄와는 달리 금속활자인쇄에는 유성잉크를 써서 강하게 눌러주어야하는데 일본은 끝내 그 기술을 체득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 웬만한 고급인쇄 시설은 일본에서 들여와야 하는 것을 생각하면 한일문화교류의 역전현상이 더 한층 뼈아프게 느껴진다.
신공일행이 휴식을 취하며 점심을 든 보태사는 정원이 넓고 아름다왔다.
신공은 『해유녹』에 이 절의 장려한 모양을 이렇게 묘사하고있다.「이 절은 이 나라에서 제일 기려하다. 정원에는 상하의 두 연못이 있는데 돌을 깍아 둑을 쌓았다. 머리를 들어 쳐다보면 기이하게 생긴 옆에서 폭포가 쏟아지는데 높이가 수십척이 되고 연못으로 떨어진다. 연못 가운데 돌다리가 놓여있고 좌우에는 기이한 꽃들이 우거져 말로 다 표현할수 없다.」
시즈오까 역앞에 있는 보태사를 찾으니 정원 연못에 금붕어와 자라들이 헤엄 치고 향나무·연산홍등 각종 정원수가 잘 가꾸어져 있다. 그러나 신공이 격찬한 폭포는 찾을수가 없다. 청기와를 얹은 중국식의 두꺼운 정문이 이국적 냄새를 풍긴다. 주지가 외국 여행중이어서 그냥 발길을 돌렸다.
시즈오까성은 명치초기에 헐리고 지금은 그자리가 공원이 되어 있었다.
성의 중심 혼마루 자리에는 매를 왼팔에 올려놓은 「도꾸가와·이에야스」의 동상이 높이 서있다.
옛날 금속활자로 인쇄를 했다는 산노마루 자리에서는 10여명의 노인들이 편을 갈라 게이트볼을 즐기고 있었다. <글 신성순 특파원 사진 김주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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