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두 여자와 살다보니 주체적 여성 캐릭터에 끌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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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락영화를 만든다고 늘 생각 해왔는데 어떤 때는 통하고 어떤 때는 통하지 않았을 뿐”이라는 박찬욱 감독은 ‘아가씨’에 대해 “대중친화적이기 보다는 원작 소설의 애독자로서 영화에선 이렇게 전개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담았다”고 말했다. 배우 김민희?김태리(오른쪽)와 함께한 박 감독. [사진 전소윤(STUDIO 706)]

박찬욱(53) 감독의 ‘아가씨’가 12일 오전, 개봉 12일 만에 300만명을 돌파했다. 그의 근작으로는 가장 대중적이라는 평가 만큼 흥행 성적도 좋다. ‘올드보이’(2003) 326만, ‘친절한 금자씨’(2005) 312만은 가뿐히 넘길 태세다.

아내가 소설 ‘핑거스미스’ 추천
딸도 영화미술팀 막내로 참여

그의 영화 중 최고 흥행기록은 2000년 ‘JSA공동경비구역’의 580만명이다. ‘아가씨’는 2013년 ‘스토커’로 할리우드에 진출한 그가 ‘박쥐’(2009) 이후 7년만에 충무로에 돌아온 작품이다. 원작은 영국 소설 『핑거스미스』. 원래 할리우드 프로젝트로 미뤘던 것을, 아내의 권유로 충무로 컴백작으로 택했다. 1930년대 조선을 배경으로 주인공 네사람의 은밀한 욕망이 펼쳐지는 영화다. “여성 캐릭터가 주체적으로 나서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는 그를 만났다.

원작의 어떤 점에 끌렸나.
“반전에 제대로 뒤통수를 맞았고, 두 여성 캐릭터가 좋았다. ‘친절한 금자씨’ 이후 여성 캐릭터에 관심이 많아졌다. ‘박쥐’의 신부 상현(송강호)도 여성적인 면을 많이 가진 캐릭터다. 주체적이고 능동적이다 못해 무섭기까지 한 여성 캐릭터가 보고 싶어서, 나도 모르게 그런 영화를 만들어온 것 같다. 그런 영화가 별로 없고, 가부장적이고 남성우월적인 한국 사회에 살면서 그런 여성상을 보고싶은 욕구가 더 강해진 것 같다. 아내와 딸, 두 여자와 살고 있는 내 환경 또한 여성 캐릭터를 더 흥미롭게 만들게 하는 자극이 된다.” (‘아가씨’ 제작을 권유한 아내에 이어, 미대생인 그의 딸은 ‘아가씨’ 미술팀 막내로 일했다. 감독의 딸이라는 게 알려지지 않게 하기 위해 부러 서로 험악하게 대했다고 했다).
작품 중 가장 이채로운 영화라고 자평했다.
“대사도 많고 주인공도 많다. 처음 시도한 시대극인데다 권선징악의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요즘 쓰는 말과 비슷하면서도, 살짝 다른 대사를 만드는 게 가장 어려웠다. 같은 사건을 두고, 인물별로 시점이 달라지는게 원작의 가장 큰 매력인데, 내가 그런 구성을 아주 좋아한다. ‘복수는 나의 것’ 또한 그런 구성에서 출발한 영화였고. 같은 사건을 다른 시점으로 보면, 못 보던 것들이 다시 보이고 숨겨진 의미가 드러난다.”
두 번째 반전이 ‘올드보이’급이다.
“원작이 많이 읽힌 책이라, 원작에 없는 새로운 요소를 넣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반전을 만들었다. 후반부 반전은 원작을 읽은 이들도 놀랄만한 것이다.”
상업영화로는 최초로 여성 동성애를 본격 묘사해 주목받았다. 어떤 느낌을 살리고 싶었나.
“친구 같은 친밀함이었다. 두 인물의 심리적 동기를 폭넓게 보면 자매애나 여성간 연대로 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순수한 사랑을 담으려 했다. 원작 소설에서 반드시 가져와야겠다고 생각한 세 요소가, 시점이 다른 구성, 첫번째 반전, 두 여성의 관계였다.”
주연 배우 4명은 어떻게 낙점했나.
“백작과 코우즈키는 용서하기 힘든 나쁜 사람들인데 상투적인 악당이 되지 않으려면 하정우나 조진웅처럼 매력있는 사람이 해야 했다. 조진웅은 ‘범죄와의 전쟁’때부터 점찍어뒀다. 하정우는 ‘멋진 하루’를 재밌게 봤고, 김민희는 ‘화차’를 보고 마음이 갔다. 처음부터 잘하는 배우가 아니라 (배우로서)놀라운 도약이 있었기 때문에 더 관심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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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 감독이 ‘아가씨’에서 역점을 둔 코우즈의 서재. 공간을 통해 인물의 내면을 보여주려 했다.

코우즈키(조진웅)는 그간 일제 강점기 배경의 영화에서 보기 힘든 유형의 인간이다.
“현실적인 이익을 위해 친일을 한다기보다, 일본은 아름답고 조선은 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취향적으로 경도된 친일파라고 할까. 조선을 혐오하면서도 밤참으로 평양 냉면을 먹는다. 여러가지를 한 몸에 담고 있는 인물이다. 코우즈키의 공간인 그의 서재는 영화미술적으로 아주 중요했다. 그 자체가 코우즈키의 내면을 보여주는, 하나의 캐릭터였다.”
실내악이라 생각하며 영화, 시나리오를 썼다고.
“작은 편성으로 친밀하게 대화하고, 부딪히고, 풀리기도 하는 점이 실내악과 비슷하다. 주인공이 네 명이기 때문에 슈베르트의 현악 4중주라고 봤다. 두 여주인공이 각각 1·2 바이올린, 하정우가 비올라, 조진웅이 첼로를 맡는 식이다. 어떤 장면에선 악기가 서로 바뀌기도 한다. 촬영 전 영화의 전반적인 느낌을 설명하고, 배우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기 위해 바흐·모차르트·슈만 등의 음악이 담긴 CD를 나눠줬다.”


▶관련 기사
① 류성희 미술감독 “아가씨 속 춘화, 미술 맡은 여성팀원들이 직접 그려”
② “신인이니까 잘못하면 잡아주겠지 생각…두려움 없었다”


특유의 잔혹함이 덜해 대중적인 박찬욱 영화로 받아들여질 것 같다.
“폭력 묘사가 덜하다고 하는데 보기 나름 아닌가. 가령 코우즈키가 히데코(김민희)와 아내(문소리)의 얼굴을 쥐고 흔드는 장면은 내가 만든 어떤 장면보다 잔인하고 폭력적이다. 내가 시켜놓고도 불쾌하고 굴욕감이 들었다. 나는 언제나 오락영화를 만든다고 생각한다. 다만 어떤 때는 통하고, 어떤 때는 그렇지 않을 뿐이다.”
‘스토커’로 연출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했었다. 차기작은?
“오래 준비한 ‘박쥐’를 찍고서 서랍을 깨끗이 비운 기분이 들었다. (‘복수’ 3부작의) 죄의식과 복수 같은 것을 떨치고 새 영역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 무렵 미국에서 ‘스토커’를 찍게 됐다. 앞으로 충무로와 할리우드를 왔다갔다 하면서 찍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는데, 잘 모르겠다. 투자를 받아야지(웃음). 세상에 뜻대로 되는 일이 있나. 분명한 건 나이 들면서 점잖아지고 엣지가 닳아서 둥글둥글해지고 싶진 않다는 것이다.”

정현목 기자 gojh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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