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정운찬 칼럼

정부는 대학의 친구인가, 적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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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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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
전 국무총리

대학이 길을 잃었다. 사회가 대학에 맡긴 역할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 위기다. 대학의 위기는 대학 자체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고 나라의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 그래서 답답하다.

대학의 중요한 책무는 교수들의 연구를 통해 국가의 새로운 지적 자산을 창출해 내고, 시대 변화를 올바르게 읽어 내고 예측함으로써 지속적인 사회 발전의 동력을 제공하는 것이다.

또한 교육을 통해 대학은 학생들이 자신의 잠재력과 창의력을 계발하고 최고의 전문지식을 습득해 국가 성장의 원동력인 인적 자원을 공급할 뿐만 아니라 올바른 판단력과 사회적 책임감, 성숙한 시민의식을 기르도록 도와야 한다. 특히 종전처럼 정형화된 지식을 전수하는 것만으로는 미래 사회의 복잡한 변화에 대처할 수 없는 오늘날, 학생들이 어떤 직종에 종사하든 평생 동안 시대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적응해 지속적으로 학습할 수 있는 든든한 잠재력을 키워 줘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대학은 이러한 연구 및 교육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대부분의 대학은 깊이와 잠재력을 갖춘 인재를 키우기보다는 기업이 현장에 바로 투입할 수 있는 인력 양성을 위한 취업 학원화의 길로 가고 있다. 최근의 프라임 사업(산업 연계 교육 활성화 선도대학 사업)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정부도 언제 바뀔지 모르는 기업의 단기적 수요에 부응해 오히려 이에 앞장서고 있는 형국이다.

무엇이 잘못됐을까? 가장 큰 것은 정부의 과도한 대학 통제이고, 무분별한 양적 팽창에 골몰하면서 자율을 지키기 위해서는 노력하지 않은 대학들도 책임이 있다. 독재정권 시절 정부는 대학이 정권 유지에 걸림돌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끊임없이 통제했다. 한편 전통이 일천한 한국의 대학들은 처음부터 질보다는 양적 성장을 추구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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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민주화 이후 도입된 대학 설립 준칙주의는 상황을 악화시켰다. 일정한 기준만 충족하면 대학 설립을 자유롭게 하자 대학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기존 대학이든 신생 대학이든 대부분의 대학은 재정기반이 취약해 정부 지원을 받지 않고는 지탱하기 어렵다. 그걸 아는 역대 거의 모든 정부는 재정 지원을 매개로 대학을 입맛에 맞게 움직이도록 압박했다.

심지어는 서울대 철폐론까지 나왔고, 제대로 지켜지지도 않는 대입에서의 3불(三不) 정책(본고사, 고교 등급화, 기여입학 금지)이 대학 정책의 전부이자 금과옥조(金科玉條)일 때도 있었다.

정부의 대학 통제는 최근 국립대 총장 승인을 둘러싸고 절정에 달했다. 대학의 자율을 상징하는 총장 직선제 사수를 위해 부산대의 고현철 교수가 자살로 맞서야 할 정도로 정부의 대학 통제는 완강했다. 고현철 교수의 희생에도 정부는 5개월간 부산대 직선 총장을 승인하지 않다가 여소야대로 총선 결과가 확정된 이후인 지난 5월 10일에야 승인했다.

그러나 아직도 45개 국립대 중에서 7곳이 길게는 21개월에서 짧게는 3개월간 총장 부재(不在) 상태다. 교수들이 뽑은 총장을 정부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승인을 거절하고 있는 것이다. 역대 어느 정부도 이런 일탈행정은 하지 않았다.

정부는 대학이 교수들에게 교육 연구 장려금을 지급한 것도 트집 잡고 나섰다. 규정에 없는 것이라며 대학에 ‘주의’라는 경고를 줬다. 서울대가 최근 겪은 일이다. 법인 전환 후 서울대의 자율권은 오히려 줄어든 셈이다. 그러니 다른 국립대들이 정부의 권유에도 법인 전환을 망설이고 있는 것이다. 대학이 행정관료의 사고 틀에 갇혀 있는 꼴이다.

사정이 이런데도 총장도, 교수도, 다른 누구도 아무 말이 없다. 자유는 스스로 쟁취해야 하듯이 대학 자율도 싸워서 얻어야 한다. 대학 구성원들이 정부의 교육 정책에 무조건 순응할 게 아니라 백년대계 관점에서 과연 옳은 것인지를 성찰하고 옳지 않으면 다른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대학은 자율을 공기로, 그리고 투자를 토양으로 발전한다지 않는가.

대학 스스로도 변해야 한다. 일부 사립재단은 학생을 수익 대상으로만 생각한 나머지 차별화되고 특화된 학교상을 만드는 대신 양적 팽창에만 주력했다. 그 결과 대학은 질적 성장에는 실패하고 대학 수와 비정규직 교수, 학생 수만 넘쳐나게 돼 구조조정을 자초했다. 정부는 대학 구조조정에서도 과도한 개입을 자제하고 강제적·반강제적 구조조정 대신 부실 대학이 자기 쇄신의 능력이 없으면 스스로 문을 닫도록 퇴로를 넓혀 줘야 한다.

우리나라의 장래는 인적 자원에 달렸다. 따라서 밉든 곱든 인적 자원의 질을 결정하는 대학에 대한 정부의 지원은 조건 없고 아낌없어야 한다. 대학은 이를 바탕으로 차별적인 연구와 교육을 통해 미래 사회가 요구하는 새로운 지식과 인재를 끊임없이 만들고 길러 냄으로써 나라 발전의 엔진이 돼야 한다. 한국은 ‘사람’만이 확실한 ‘자본’이기 때문이다.

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전 국무총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