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NG] 심보선 ‘갈색 가방이 있던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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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색 가방이 있던 역
-심 보 선

작업에 몰두하던 소년은
스크린도어 위의 시를 읽을 시간도
달려오는 열차를 피할 시간도 없었네.

갈색 가방 속의 컵라면과
나무젓가락과 스텐수저
나는 절대 이렇게 말할 수 없으리.
“아니, 고작 그게 전부야?”

읽다 만 소설책, 쓰다 만 편지
접다 만 종이학, 싸다 만 선물은 없었네.
나는 절대 이렇게 말할 수 없으리.
“더 여유가 있었더라면 덜 위험한 일을 택했을지도.”

전지전능의 황금열쇠여,
어느 제복의 주머니에 숨어 있건 당장 모습을 나타내렴.
나는 절대 이렇게 말할 수 없으리.
“이것 봐. 멀쩡하잖아, 결국 자기 잘못이라니까.”

갈가리 찢긴 소년의 졸업장과 계약서가
도시의 온 건물을 화산재처럼 뒤덮네.
나는 절대 이렇게 말할 수 없으리.
“아무렴. 직업엔 귀천이 없지, 없고 말고.”

소년이여, 비좁고 차가운 암흑에서 얼른 빠져나오렴.
너의 손은 문이 닫히기도 전에 홀로 적막했으니
나는 절대 이렇게 말할 수 없으리.
“난 그를 향해 최대한 손을 뻗었다고.”

허튼 약속이 빼앗아 달아났던
너의 미래를 다시 찾을 수만 있다면
나는 절대 이렇게 말할 수 없으리.
“아마, 여기엔 이제 머리를 긁적이며 수줍게 웃는 소년은 없다네.”

자, 스크린도어를 뒤로하고 어서 달려가렴.
어머니와 아버지와 동생에게로 쌩쌩 달려가렴.
누군가 제발 큰 소리로 “저런!” 하고 외쳐주세요!
우리가 지옥문을 깨부수고 소년을 와락 끌어안을 수 있도록

구의역 스크린 도어에 붙은 심보선 시인의 자필 추모 시 '갈색 가방이 있던 역'. 출처=이진경 교수 페이스북

구의역 스크린 도어에 A4용지 사이즈의 자그마한 시(詩)자보가 붙었습니다. 시집 『슬픔이 없는 십오초』로 유명한 심보선 시인이 자필로 써내려간 시입니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폴란드 여류 시인 비스와봐 쉼보르스카의 시 '작은 풍선이 있는 정물'의 오마주임을, 옆에 나란히 붙여놓은 원작시로 알려줍니다.

시인은 홀로 스크린도어를 고치다 죽은 청년을 생각하며 가슴이 아파 잠을 잘 수 없었다고 합니다. 괴로워하는 시인에게 이진경 서울과기대 교수는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너는 시를 써야 한다. 머지 않아 다 잊을텐데, 그래도 잊지 않는 이들이 있도록 시를 써야 한다."


심보선 시인은 다음날 쉼보르스카의 시를 읽다 영감을 받아 시를 썼고, 구의역 스크린도어에 가서 손수 붙였다고 합니다. 이 교수는 시와 시자보가 탄생한 배경을 지난 8일 자신의 페이스북(https://www.facebook.com/jinkyung.yi.1?pnref=story.unseen-section)에 올렸습니다.

잊지 않는 이들이 있도록, 심보선 시인의 '갈색 가방이 있던 역'을, 시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기록으로 남깁니다.

정리=이경희 기자 dungl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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