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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 라인강의 기적은 어디로|"자녀보다 더 큰차갖는게 중요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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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얼핏 한국사람들에게는 친근한것 처럼 느껴지는 서독체재 4년- 기자는 애써 분단국, 수출의존형 경제구조라는 시각에서 체험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한국과 비슷한 사정을 갖고 있을것이라는 처음의 막연한 생각을 4년동안 고쳐 갖지않을수 없었다. 서독이 근면성으로 경제기적을 이룩한 사실이나 지금도 경제강국이란 사실엔 변함이 없어 배울것도 많지만 최근 몇년동안 나타나는 사회현상에는 그렇지 않은 것도 많다. 4년간의 서독체험을 ①근면성문제 ②청소년문제 ③양독관계로 나누어 정리해본다.
84년 2월, 서독의 상업도시 뒤셀도르프. 부슬부슬 내리는 궂은비를 맞으며 말끔한 양복차림의 신사 1천여명이 플래카드를 들고 길거리에 나섰다.
신사들이 들고있는 플래카드에는 『주35시간 노동반대』 『노동시간을 줄이는것은 경쟁자인 일본을 돕는 일이다』 등의 구호가 적혀 있었다. 주8시간 노동을 7시간으로 단축하자는 노조의 주장에 대항한 기업경영자들의 가두시위였다.
주말 2일, 각종 공휴일과 휴가를 합치면 1년의 42%인 1백54일 이상을 노는 서독노동자들의 이러한 노동시간 단축요구는 기업경영자 쪽에서 보자면 『노는 시간을 더 달라』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한때는 독일사람들의 미덕으로 일컬어지던 「근면」이란 옛말처럼 어색한 감마저 든다.
직업이나 노동은 순전히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인것처럼 돼버리고 1년에 한두번씩 갖는 휴가경비를 위한 저축수단으로 생각하는것이 더 편한다.
실제로 여름한철 20일내지 30일가량 휴가가 끝나면 곧 바로 다음해 휴가를 어디서 어떻게 보내야할지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여행사들은 1년내내 휴가예정 프로그램 판매에 바쁘고 고객들은 대개 휴가 반년전에 예약을 끝내버린다.
휴가에대한 열성은 외국여행자수를 보면 쉽사리 드러난다. 매년 휴가명목으로 외국에서 1주일이상 보내는 서독사람은 국민의 60%를 육박하는 2천7백만명. 여기에 드는 경비가 국가예산의 20%수준인 2백10억달러에 이른다.
미국사람의 연 해외관광비용 지출 1백10억달러에 비해 2배에 가까운 금액이다.
외국관광비 지출은 서독의 절반이지만 「보수가 얼마이든 직무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사람이 미국에선 50%인데 서독에서는 25%가 고작이다. <슈피겔지조사>
아직도 미국·일본과 함께 세계경제를 이끌어가는 「3대의 기관차」로 일컬어지는 서독. 「라인강의 기적」이란 이름으로 번영을 구가하던 경제는 계속 성장속도가 둔화되고 있다.
국민총생산(GNP)의 성장률도 10년주기로 내러가고 있다. 1950년대에 8% 수준이던 년평균 실질성장률은 60년대엔 4∼5%로 내려가고 70년대에는 3%수준에 머물렀다.
80년대에 들어서서는 GNP 성장이 1∼2%선에서 맴돌고 전후 최고의 실업(10%), 최고의 도산건수(년 1만2천여건), 최고의 재정적자를 기록하고 있다. 그렇지만 서독사람들의 생각은 이미 달성한 생활수준에 만족하면서 경제현실을 감수하기 보다는 좀 더 높은 생활수준을 추구하고 있다.
「안락하고 즐거운」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일을 더하고, 휴가를「절약」하기 보다는 차라리 노동시간이나 인구를 「절약」하려한다.
그래서 『좀더 큰 자동차와 여가향락이 자녀를 갖는것 보다 중요하다』 『안락한 생활을 즐긴뒤에 자녀를 갖겠다』는 사람이 불어나고 있다.
이런 서독사람들의 생각은 기자가 접해본 서독사람들의 가족생활에서도 자주 볼수있었다. 어느 가정을 가더라도 자녀 2명을 가진 경우를 찾아보기 힘들다. 1명의 자녀가 있거나 아예 가질생각을 하지않는다. 한 대학 심리학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25∼45세의 부부중 물질생활의 풍요함이나 출세보다 자녀가 중요하다고 보는「가정지향형」은 10%에 지나지 않고 있다.
그결과 서독은 지난 10년사이 인구가 연평균 10만∼15만명씩 줄어들고 있는 유일한 나라가 되고 있다. 이같은 인구감소 현상을 두고 기자와 가까이 지내던 30대후반의 한 서독인부부는 다음과 같이 농담조로 한탄했다.
『20년쫌뒤 우리부부가 은퇴할때가 되면 서독은 더 가난해지고 우리부부는 더 살기 어려워 질것이다. 지금 노인들은 사회보장혜택으로 일하지 않고도 연금을 많이 받아 일하는 우리보다 더 풍족하게 살고 있다. 그런데 지금 젊은 사람들은 일하는것보다는 산업화정책을 반대하고 자녀까지 가지지 않으려하고 있다. 그러면 인구는 점점 줄어들고 국가경제규모가 줄어들것은 뻔하다. 우리가 은퇴해 연금을 받을때쯤 되면 국가의 세금수입도 줄어들 테니 우리는 죽도록 일만 하고 노후를 어렵게 살것이 뻔하다.』
소박한 논리지만 일리가 있는 걱정이라 생각됐다.
서독의 이런 사회현상이 정치적으로 표출된 현상중의 하나가 83년부터 중앙정계에 진출한 녹색당이다.
녹색당-독일어로 푸르름을 뜻하는 이 정당의 이름인 「그뤼네」(Grune) 는 우선 산뜻한 느낌을 준다. 핵무기·핵발전·군비경쟁에서부터 환경파괴에 반대하겠다는 이 정당의 출현은 많은 젊은이들의 호응을 받았다.
기술발전도, 큰 공장건설도 이 정당은 싫다고 한다. 이들은 전기난방이나 가스난방보다는 장작난로를 좋아한다. 「기계보다는 맨손」이라는 논리다. 물질적 풍요만 추구하다 보면 정신적으로 피로해 지고 인간다운 삶을 찾기가 어렵다는 주장이다.
이상으로는 누구에게나 공감이 가는 얘기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산업화시대 이래 계속 있어왔고 다른 나라에도 없는것이 아니다.
그런데 유독 서독에서만 이들이 정치세력으로 부상한 원인은 어디 있는가.
악착같은 경제활동 보다는 아름다운 자연속에 안거하자는 이들의 주장은 뒤집어 생각하면 삶을 즐기자는, 레저를 추구하는 서독사람들의 일반적인 분위기와도 관계가 있다.
서독 보쿰대학의 개발정책연구소장을 지낸 「빌리·크라우스」교수는 이러한 서독사회의 현상을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있다.
『지금 서독에서는 스스로 책임을 지고 어려운 일을 해내겠다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연구의욕·근면·지성·책임의식·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앞에 나서는 인물은 오히려 불신과 혐오감을 받고있다. 공동체의식이 저하되고 규율은 뒷전으로 밀려나가면서 자기중심주의가 우선되고 있다. 이런 분위기가 사회계층에 확대돼 경영자는 낡은것을 대체하여 새로운것을 만들어 내겠다는 진취정신이 죽어가고 있다. 근로자는 금요일 오후부터 시작되는 긴 주말을 당연한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서독사람들의 심리적 단면을 보여주는 재미있는 예가 하나있다. 사람을 만날때마다 늘 하는 인사로 『어떻게 지내십니까』라고 물으면 『잘 지냅니다』고 대답하는 사람은 드물다. 『나쁘다』 『그저그렇다』고 대답하기 일쑤다. 하도 심하길래 물어봤더니 이는 기자만의 경험뿐 아니라 자기네끼리의 인사도 잘아는사이면 늘 그렇다는 대답이다.
『왜 나쁘냐』고 물으면 『일이 너무많다』 『쉴 시간이 없다』는 것이 대부분의 대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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