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벙커’에 빠진 일자리 5만 골프산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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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산업을 살리자 ① 벙커에 빠진 골프산업 <상>

그동안 한국 경제의 성장을 이끌어온 건 수출 제조업이었습니다. 그러나 세계적인 불황에 제조업은 구조조정의 덫에 걸렸습니다. 여기다 알파고로 상징되는 ‘4차 산업혁명’도 사람의 일자리를 빠른 속도로 대체하고 있습니다. 기계가 아닌 사람이 해야만 하는 ‘사람산업’을 살리지 않고선 새 일자리를 기대하기 어렵게 됐습니다. 중앙일보는 올 연중기획으로 기계가 대체할 수 없는 사람산업의 현황과 육성 방안을 모색해 보겠습니다. 첫 회 골프산업, 두 번째 관광산업에 이어 의료·교육·한류 등을 차례로 다룰 예정입니다.

| 국내 골프장 절반이 적자
충주 SG선 캐디 80명 떠나
새 일자리 만드는 32조 시장
“퍼블릭 전환 길 열어줘야”

충북 충주에 있는 SG골프클럽(옛 상떼힐CC)엔 경기보조원(캐디)이 없다. 2년째 골프장 운영을 못하고 있어서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경영난에 시달리다 2013년 새 주인을 찾았지만 이해당사자 간 갈등으로 여태껏 문을 열지 못했다. 이로 인해 한때 70~80명에 달했던 캐디가 일자리를 잃었다. 직원도 최소한의 코스관리 인력만 남았다. 1989년 개장해 한때 ‘명문’으로 불렸던 과거는 잊혀진 지 오래다.

국내 골프장 절반(49.2%)이 적자다. 자본잠식에 허덕이다 회생 절차에 들어간 곳도 부지기수다. 국내 골프장은 10년 전보다 두 배 가까이로 늘었다. 전체 골프인구가 늘었어도 홀당 내장객 수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 자연히 가격 경쟁은 치열해졌고 수익성은 악화했다.

특히 회원제 골프장의 시름이 깊다. 충북 A골프장 대표는 “매년 30억~40억원씩 적자를 내 세금도 못 낼 판”이라고 말했다. 세금 부담이 덜한 대중제(퍼블릭)로 전환하려는 골프장이 늘고 있지만 그러려면 회원들이 낸 입회금을 돌려줘야 한다. 곳곳에서 이를 둘러싼 분쟁이 끊이지 않는다.

위기는 업계가 자초했다. 2000년대 중반 너나 할 것 없이 골프장 건설에 뛰어들었다. 10억원 정도만 있으면 입회금을 모아 1000억원짜리 골프장을 지을 수 있었다. 회원권 가격의 상승세를 경험한 회원들도 1억~2억원짜리 회원권을 쉽게 사들였다. ‘설마 떨어지겠느냐’며 안이하게 생각했다. 세수에 목마른 지방자치단체 역시 마구잡이 허가를 내줬다.

비슷한 시기 일본에선 2400개의 골프장 중 약 900개의 주인이 바뀌었다. 미국에서도 골프장 통폐합이 진행됐다. 불과 몇 년 후를 내다보지 못한 한국만 역주행한 셈이다.

골프는 스포츠인 동시에 수만 명의 일자리가 걸린 대표적인 ‘사람산업’이다. 김도균 경희대 골프산업학과 교수는 “골프를 어떤 시선으로 볼 것이냐를 따지기 전에 골프는 모든 스포츠 중에 시장 규모가 가장 크다”고 말했다.

국내 골프장의 한 해 매출은 5조8000억원(연습장 포함). 회원권과 용품·의류 등 전체 산업 영역으로 확장하면 약 32조원 규모다. 무엇보다 고용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 현재 골프장과 골프연습장의 일자리만 약 5만 개다. 골프산업이 무너지면 이들부터 갈 곳을 잃는다.

더욱이 골프용품이나 의류 생산업체는 대부분 중소기업이다. 구조조정 덫에 걸린 제조업에선 새 일자리를 기대하기 어렵게 된 만큼 사람산업을 살리는 게 일자리를 늘릴 유일한 길이란 지적이 나온다.

교통정리가 필요한데도 정부는 뒷짐만 졌다. 골프를 사치·향락산업으로 보는 시선이 강해서다. ‘바쁘셔서 골프 칠 시간이 있겠느냐’는 대통령의 한마디는 이런 분위기에 못을 박았다. 늦게나마 정부가 방향을 잡았다.

지난 2월 정부는 회원제 골프장의 대중제 전환 요건을 100%에서 80%로 완화하고, 저금리 대출로 입회금 반환 부담을 낮춰 주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소 잃고 외양간 고친 뒷북 대책이란 지적이 나온다. 법령 어디에도 ‘100%’라는 숫자는 없다. 유권해석이 있을 뿐이다. 규정도 없는데 완화를 하겠다고 나선 셈이다.

골프장별로 수백억원에 이르는 입회금 반환도 1%포인트의 금리 지원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관련 기사
① 골프인구 531만 명인데 골프장 경영난, 일자리 사라진다
② 회원제에서 퍼블릭으로 전환 쉽게 제도적 지원을



여기다 더 큰 태풍이 다가오고 있다.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김영란법)’이 9월 시행된다. 업계엔 공멸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감돈다. 결국 골프장이 살아남으려면 ‘접대’나 ‘부자들의 놀이터’라는 키워드를 떠올리지 않을 생활스포츠로 전환하는 수밖에 없다.

서천범 한국레저산업연구소장은 “대중제 전환과 요금 인하라는 큰 흐름에 맞춰 골프장이 스스로 혁신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렵다”며 “정부도 골프를 고부가가치 서비스산업으로 키울 큰 그림을 그려야 할 때”라고 말했다.

장원석 기자 jang.wonse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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