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톡톡 튀는 그들의 작품, 제품화에 성공할 수 있을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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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1호 24면

서울 염곡동 코트라(kotra)에서 열리고 있는 스포츠아트 국가대표전에 출품한 이재성 작가(주키ㆍ왼쪽)와 최호근 작가(페노메노)가 자신들의 작품 앞에서 힘찬 도약을 의미하는 포즈를 취했다. 김경빈 기자

예쁘장한 캐릭터 인형을 새겨넣은 물병이 있다.캐릭터는 한국 축구 국가대표 선수를 연상시킨다. 영어 캘리그라피(손글씨)로 모양을 낸 헬멧과 운동화도 있다. 느낌이 강렬하고 산뜻하다. 화려한 색채와 디자인이 돋보이는 티셔츠도 눈길을 사로잡는다. 축구 심판이 선수에게 퇴장을 명하는 레드 카드를 내미는 그림이다. 그런데 레드 카드에 하트(♡)가 그려져 있다.


스포츠에 디자인을 입히는 사람들이 뭉쳤다. 서울 염곡동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본관 1층에서 열리고 있는 스포츠아트 국가대표전(展)에서다. ‘스포츠아트와 기업의 콜라보 기획전’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전시회에는 화승(르까프)·삼광글라스 등 17개 업체가 참가했다. 디자이너로 참여한 작가는 11명이다. 코트라(kotra)는 오는 7월, 올림픽이 열리는 브라질 리우에서 이 제품들을 소개하는 전시회를 열 계획이다.


스포츠는 단순히 보고 즐기는 차원을 넘어 일상이 됐다. 스포츠 의류와 신발, 액서서리 등을 소비하는 사람들이 크게 늘었다. 그렇지만 아직 우리나라 스포츠 용품 시장은 영세하다. 나이키·아디다스 같은 글로벌 브랜드가 나오지 않고 있다. 미국에서 나이키의 아성을 위협하는 언더 아머(UNDER ARMOUR) 돌풍도 남의 얘기다.


스포츠를 좋아하고, 스포츠를 통해 의미 있는 작품을 남기고자 땀을 흘리고 있는 작가들을 만났다. 한국 스포츠 디자인, 나아가 스포츠 산업의 맨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광작가’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는 김민석 씨는 영어 캘리그라프로 디자인 한 헬멧과 운동화 등을 출품했다.

“디자인보다 기능에 집착한 게 패인”‘광(光)작가’라는 필명으로 활약하고 있는 김민석 씨. 한양대 시각디자인과를 졸업한 그는 농구광이다. 그래서 농구 관련 작업을 많이 한다. 요즘은 영어 캘리그라프를 활용한 작품을 활발히 내놓고 있다. 힘찬 필치와 일러스트레이션이 결합해 강렬한 시각 효과를 낸다. 영어를 세로로 쓰기도 한다.


그는 국내 스포츠 용품 시장이 성장하지 못한 이유를 ‘디자인의 부재’에서 찾았다. “스포츠웨어나 등산복 등 우리나라도 시장이 작은 건 아닙니다. 그런데 업체들이 가볍고, 착용감 좋고, 통기성 뛰어난 제품, 즉 기능성에 너무 집착했던 것 같아요. 1980년대 초중반에는 국산 프로스펙스 농구화가 나이키와 경쟁을 한 적도 있어요.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나이키는 세련된 반면 프로스펙스는 왠지 촌티 난다는 생각을 사람들이 하게 됐어요. 그 뒤로 국산 운동화 시장이 확 죽어버렸죠. 디자인과 이미지 메이킹 싸움에서 나이키에 완패한 겁니다.”


‘광작가’는 과감한 아이디어와 기발한 디자인으로 승부를 걸어야 하는데 그런 모험정신이 사라진 것 같다고 안타까워 했다. “국산 브랜드 만드는 분들이 나이키나 아디다스와 비슷한, 무난한 제품만 내놓거든요. 그래서는 나이키·아디다스를 따라잡을 수 없어요. 문제는 국내 업체들이 다들 영세하다 보니 한번 모험했다가 실패하면 다시 일어서기 힘들다는 겁니다.” 그는 “기능은 어차피 끝이 보이는 거고, 이제는 디자인이라는 콘텐트로 승부해야 합니다. 정부에서 디자인 우수 업체에 상을 주기도 하는데, 상 받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많이 팔리느냐가 중요하죠”라고 강조했다


인천대에서 디자인을 전공한 최호근 씨는 ‘페노메노’라는 필명으로 활약하고 있다. 축구를 좋아해 축구 유니폼을 수집하다가 아예 직접 만드는 쪽으로 직업을 삼았다. 최근 프로축구에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성남 FC 구단의 디자인을 총괄한다. 홈 경기장의 포스터와 현수막, 티켓과 머천다이징(기념상품) 디자인까지 그가 책임진다. 성남은 시민구단으로 바뀌기 전인 성남 일화 시절 K리그 우승을 7번이나 했을 정도의 명문 구단이었다. 트로피는 많이 수집했지만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성남 일화의 상징이었던 노란색 유니폼에는 ‘맥콜’이라는 광고가 큼지막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2014년 시민구단으로 바뀌었고, 다음해 성남의 골수 팬인 만화가 김근석 씨(필명 샤다라빠)가 새 유니폼을 디자인했다. 축구 유니폼으로 잘 쓰지 않은 검정색을 과감하게 선택한 김 작가의 감각이 빛났다. 축구팬들은 “달라져도 이렇게 달라질 수가…”라며 감탄했다.

광작가가 그린 농구 선수일러스트레이션 작품.

최호근 작가는 ‘포워드(FORWARD)’라는 축구 유니폼 브랜드도 만들고 있다. 요즘은 프린트 기술이 좋아져서 고객이 원하는 색상과 디자인으로 ‘맞춤형 유니폼’을 제작해 준다. 운동할 때 뿐만 아니라 일상복으로 입을 수도 있을 정도로 디자인이 깔끔하다.


최 작가는 국내 스포츠 상품 시장이 악순환을 겪고 있다고 설명했다. “미국이나 유럽처럼 스포츠 역사가 깊은 곳은 팬층도 두텁게 형성돼 있어요. 그들은 자신이 응원하는 팀의 유니폼이나 기념품을 사기 위해 기꺼이 지갑을 열어요.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그런 걸 왜 돈 주고 사냐. 그냥 주는 것 아니냐’고 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러다 보니 구단들도 머천다이징 상품을 정성껏 만들려고 하지 않고, 품질이 조악하다 보니 사람들이 외면하고, 이런 악순환이 이어지는 것 같아요.”


“돈 안 되고 자존심 상해” 엉엉 울던 후배장부다(47ㆍ부다장 대표) 씨는 국내 스포츠 디자이너 1세대다. 그는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붉은악마 응원단의 상징이었던 ‘치우천황’ 디자인을 만들었다. 프로축구단 엠블럼 작업도 많이 했다. 대전 시티즌 엠블럼은 백제 금동향로를 모티브로 했고, 경남 FC 엠블럼에는 거북선과 가야 금관을 등장시켰다. 그가 만든 엠블럼들은 연고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잘 활용했다는 호평을 받았다.


장 대표는 열악한 환경에서 고군분투하는 후배들이 안타깝다고 했다. “체대를 졸업하고 스포츠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는 후배를 얼마 전에 만났어요. 이 일만으로는 생활이 안 되니까 투잡을 뛰어야 하고, 무엇보다 자존심 상하는 일들이 너무 많다며 덩치도 큰 녀석이 눈물을 뚝뚝 흘려요. 그래서 ‘이 바닥이 터프하지만 미래는 있다. 황무지를 개척하는 심정으로 조금만 더 버텨 봐라’고 위로해 줬습니다.”


장씨는 스포츠 디자이너들이 각자 흩어져 외로운 싸움을 벌이지 말고 단체를 만들어 뭉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스포츠디자인산업협회 같은 조직을 만들면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국내 스포츠산업체의 영세성을 고려해서 문체부가 ‘인큐베이팅 시스템’을 작동해야 한다고 봅니다. 프로스포츠 구단 몇 개를 지정해 3~5년 정도 구단 용품을 만들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겁니다. 디자이너들에게 안정적인 일자리를 주고, 구단들도 ‘잘 만들면 돈이 되는구나’ 하는 걸 느끼도록 해 줘야죠”라고 말했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김용섭 문체부 스포츠산업과장도 같은 맥락의 얘기를 했다. “스포츠 디자이너들이 공신력 있는 단체를 만들면 우리도 지원할 겁니다. 이분들과 제조업체를 연결해 주는 역할을 스포츠산업과에서 해줄 수 있죠.”


김 과장은 스포츠산업과 예산이 1000억원을 넘어섰다고 소개했다. 올해는 융자 540억, 펀드 200억, 연구개발에 140억 정도가 배정됐다고 한다. 그는 “창업 인큐베이팅 사업 세 군데를 지원하고 있는데 범위도 넓히고 예산도 더 따와야 되겠죠. 될성부른 떡잎을 키우는 심정으로 자생력 있는 분야를 밀어주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사진을 찍기 위해 지난 25일 전시장을 다시 찾았다. 최호근 작가와 이재성 작가(필명 주키)가 왔다. 이 자리에 축구용품 사업을 하는 ‘다이브인풋볼’의 백승남 대표도 함께 했다. 백 대표는 수원 삼성을 비롯한 K리그 6개 구단의 머천다이징 일을 맡고 있다. 중국 프로축구 상하이 상강 등 4개 구단에도 납품을 하고 있다.


“스포츠 디자인 중요성에 눈을 떴으면”자연스럽게 디자이너와 용품업체 대표의 대화 자리가 만들어졌다. 백 대표는 제조업체의 고충을 털어놨다. “작가들은 기발한 아이디어로 뛰어난 디자인을 만들어 내지만 그게 다 상품화 되는 건 아니거든요. 디자인을 조금만 바꿔도 제조 원가가 크게 올라가고, 다 팔리지 않으면 재고 부담도 커집니다. 다행인 건 ‘작품’과 ‘제품’이 합쳐진 콜라보에 사람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는 점이죠.”


주키 작가가 말을 받았다. “디자인과 생산이 협업을 하면 더 좋은 게 나올 수 있을 겁니다. 문제는 스포츠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스포츠 디자인을 너무 쉽게 생각한다는 거죠. 평창 올림픽 메인 디자인 선정작업에 참여한 적이 있는데, 아직도 태극문양, 건곤감리, 오방색 같은 데만 집착하는 자칭 전문가들이 있더라고요.”


마무리는 최 작가가 했다. “스포츠 쪽에서도 디자인의 중요성에 대해 눈을 떴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다시 만나서 멋진 작품을 만들어내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고요.”


작가들과 헤어진 뒤 전시관을 한번 더 돌아봤다. 기발하고 깜찍한 녀석들이 “날 좀 시장으로 내보내 주세요”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현재 여건에선 이 작품들이 ‘제품’으로 살아남을 가능성은 크지 않다.


정영재 스포츠선임기자jerr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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