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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영 회장 한진해운 주식 매각 막전막후] 1800억대 부자가 10억 손해 피하려고?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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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영 유수홀딩스 회장.

“상속세 상환용으로 빌렸던 대출금을 갚기 위해 주식을 팔았다.” 미공개 정보를 이용한 불공정 주식거래 혐의(자본시장법 위반)로 검찰 수사를 받고 있는 최은영 유수홀딩스 회장(전 한진해운 회장)의 해명이다. 최 회장은 한진해운이 채권단 공동관리(자율협약)를 신청할거라는 걸 회계 컨설턴트 등으로부터 미리 듣고 보유 주식 31억원어치를 전량 매각한 의혹을 받고 있다. 수사와 재판을 거쳐 혐의가 확정되면 10년 이하 징역과 추징금·벌금(부당이득 3배) 부과 처벌을 받을 수 있다.

검찰 수사에 ‘계열분리 수순’ → ‘대출 상환 자금 마련용’으로 말 바꿔

자율협약 이후 주가 하락을 감안했을 때 최 회장이 회피한 손실은 10억원가량이다. 그런데 최 회장의 재산(추정액)은 보유 주식·부동산 등을 합쳐 1850억원으로 평가된다. 2013~2014년 한진해운에서 받은 보수만 97억원이기 때문에 현금도 꽤 보유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더구나 최 회장이 대주주인 유수홀딩스는 지난해 475억원의 당기순이익을 냈다. 재산이 많은 것은 물론 사업도 잘 되고 있다는 얘기다. 이처럼 금전적으로 부족한 게 없어 보이는 최 회장이 큰 위험을 감수하고 주식을 매도한 이유가 뭘까. 이를 추론하기 위해서는 우선 사실관계부터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최은영 회장이 주식을 다 팔았네. 뭐가 있나?” 4월 21일 금융감독원 간부가 기자에게 한 말이다. 곧바로 금감원 전자공시시스템(DART)을 찾아보니 최 회장과 두 딸은 4월 6일~20일 2주 간에 걸쳐 보유주식 67만주(지분율 0.39%)를 장내 매도했다고 공시했다. 최 회장은 2년 전인 2014년 한진해운 경영권을 시숙인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에게 넘겼다. 한진해운 경영 상태가 어려워지자 조 회장이 구원투수 격으로 경영을 맡았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났지만 최 회장은 4월 주식 매도 전까지 지분구조상 대한항공과 함께 한진해운의 대주주로 묶여 있었다.

4월 초만 해도 한진해운의 자금난이 심각하다는 것만 알려졌을 뿐 자율협약을 신청할 거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미 조건부 자율협약에 들어간 현대상선의 구조조정에 관심이 집중돼 있었던 데다 한진해운은 현대상선만큼 어렵지 않다는 게 금융권의 대체적인 여론이었기 때문이다. 주채권은행인 산업은행의 이동걸 회장이 3월 말 조양호 회장을 직접 만나 강도높은 자구책을 요구했다는 정도의 팩트만 나온 상황이었다.

그런데 최 회장이 주식 매도 사실을 공시한 지 하루 만인 4월 22일 한진해운은 모두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산업은행에 자율협약을 신청했다. 누가 봐도 전날 최 회장의 주식 매도를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자율협약 정보를 미리 알고 주식을 판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이러자 최 회장은 “한진그룹과 유수홀딩스의 계열분리 신청을 하면서 지난해 5월 공정거래위원회에 지분 매각 계획을 보고했고, 계획대로 매각했을 뿐 미공개 정보를 이용한 적이 없다”고 해명했다.

석연찮은 해명이 의혹을 더 키웠다. 금융위원회는 “친족 분리에 따른 최 회장 측의 한진해운 지분 정리(3% 이하)는 지난해 상반기 모두 완료됐다”며 “이번에 매도한 지분은 의무 처분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계열분리와는 상관없다”고 반박했다. 결국 금융위 자본시장조사단은 4월 25일 최 회장의 미공개 정보 이용 혐의에 대한 조사에 착수해 증거를 확보한 후 5월 10일 서울 남부지검에 수사를 의뢰했다. 금융위와 검찰이 수사 과정에서 최 회장이 한진해운 내부 사정을 잘 아는 회계 컨설턴트로부터 ‘한진해운이 자율협약에 들어갈 것’이라는 정보를 미리 전달받았다는 정황을 포착했다.

이러자 최 회장은 주식 매도 이유에 대해 ‘계열분리 수순’이라던 원래 입장에서 대출 상환 자금 마련용이라고 말을 바꿨다. 남편인 고 조수호 한진해운 회장으로부터 물려받은 주식의 상속세를 내기 위해 대출을 받았는데, 대출 만기가 돌아와 한진해운 주식을 처분한 돈으로 상환했다는 얘기다. 현금이 없어 주식을 팔아 대출금을 갚아야 했다는 뉘앙스다.

금융권에서는 이 역시 쉽게 납득할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유수홀딩스 주식과 본인 보유 부동산을 팔거나 담보대출을 통해 얼마든지 기존 대출금을 갚을 수 있는 상황인데 한진해운 주식을 판 것 자체가 대주주로서 무책임한 행동이라는 얘기다. 최 회장이 마지막 한진해운 지분을 매도한 4월 20일을 기준으로 최 회장의 보유지분(18.11%) 가치는 558억원이었다. 상속세를 내기 위해 유수홀딩스 지분을 일부 팔았어도 최 회장의 대주주로서의 지배력은 흔들리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유수홀딩스의 모태는 한진해운이다. 한진해운과의 거래를 통해 매출을 내는 중견기업들의 지주사로 출발했기 때문이다. 이 지주사는 싸이버로지텍(물류 정보기술), 유수로지스틱스(화물운송 중개 사업), 유수에스엠(선박관리) 등으로 이뤄져 있다.

그럼에도 최 회장은 유수홀딩스 대신 한진해운 지분을 팔았다. 증권가에서는 올 들어 4월 20일까지 유수홀딩스 주가가 50%(7780원→1만1850원)가량 오른 반면 같은 기간 한진해운 주가는 20%(3635원→3030원) 떨어진 점에 주목한다. 익명을 요청한 한 애널리스트는 “두 주식을 모두 보유한 개인투자자라면 한진해운 주식을 팔고, 유수홀딩스 주식은 더 오를 때까지 보유하려 할 가능성이 크다”며 “최 회장도 개인투자자와 비슷한 심정으로 한진해운 지분을 판 것이 아닐까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최 회장은 한 때 한진해운 최고경영자(CEO)였고, 지금까지도 지분구조상 대주주에 포함돼 있다는 점이 일반 투자자와 다르다. 기업이 어려워져도 끝까지 책임지는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보여줘야 하는 위치다. 그런데 일반투자자처럼 주식을 팔았다면 설령 자율협약 신청 정보를 몰랐더라도 심각한 모럴해저드(도덕적해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부동산담보대출도 쉽게 받을 수 있었다. 유수홀딩스가 보유한 서울 여의도 본사와 바로 옆 푸드타운 ‘테라스원’을 합친 부동산 가치는 약 2000억원으로 추정된다. 현재 유수홀딩스의 임대료 수익은 연간 140억원 규모다. 여기에 테라스원에도 다양한 컨셉트의 외식 전문점이 입주하고 있어 앞으로 임대료 수익은 더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주식을 팔아 상속세를 내야 할 만큼 현금 여력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재벌닷컴에 따르면 최 회장은 2014년 CEO 자리에서 물러나기 전 2013~2014년 보수·퇴직금 명목으로 97억원을 받아 갔다. 당시는 한진해운이 2년간 총 1조1747억원의 적자(당기순 손실)를 보던 시기였다. 최 회장과 두 딸은 지난해 싸이버로지텍 지분 27.5%에 대한 결산배당금 5억5000만원을 받기도 했다.


l 웅진그룹·동양그룹 위기 때도 도덕적해이


위기에 빠진 기업 대주주의 난파선 탈출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윤석금 웅진그룹 회장의 부인 김모씨는 2012년 웅진홀딩스의 법정관리 신청 전 웅진씽크빅 주식 4억원어치를 매도했다. 2013년 사기성 회사채 발행으로 투자자에게 피해를 준 동양그룹 경영진도 계열사들이 한꺼번에 법정관리에 가기 직전 주식을 팔았다가 법적 처벌을 받았다. 전문가들은 기업 대주주의 도덕적해이와 미공개 이용 주식거래 범죄를 막으려면 정치권과 재계가 함께 투명한 기업지배구조를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한성대 무역학과 교수)은 “금융당국·사법당국의 사후 단죄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며 “이사회 기능 강화와 주주대표소송 활성화 같은 사전 제동 장치가 제대로 작동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 이태경 기자 uni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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