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20대 국회로 넘어간 ‘상시 청문회’ 숙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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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어제 박근혜 대통령은 국회 상임위가 ‘소관 현안의 조사’를 위해 청문회를 실시할 수 있게 한 국회법 개정안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그동안 상임위원회는 ‘중요 안건의 심사’와 ‘국정감사’ ‘국정조사’ ‘법률안 심사’에 필요한 경우 청문회를 열었는데 국회법 개정안은 청문회 대상 범위에 ‘소관 현안’을 추가한 것이다. 이 법안은 19대 국회의 마지막 본회의(19일)에서 야당의 찬성 표에다 여당 일부의 반란표가 가세해 의결된 바 있다.

박 대통령은 이 법안에 대해 19대 국회 종료(29일)를 이틀 앞두고 거부권을 행사함으로써 정국은 또다시 격동과 갈등에 휩싸이고 있다. 황교안 총리가 주재한 국무회의에서 정부 측은 “상시 청문회는 행정부에 대한 견제가 아니라 통제”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여러 측면을 고려할 때 거부권 행사는 성급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여소야대 정국에서 상시 청문회 문제보다 훨씬 중요한 야당과의 소통·공감·협치의 가능성을 닫아버렸기 때문이다.

거부권 행사의 법률적 용어는 대통령의 국회에 대한 재의(再議)요구다. 헌법 53조4항은 재의 요구가 있을 때 국회는 이를 재의에 부치도록 의무화하고 있다. 국회법상 재의에는 본회의 공고 등 최소한 사흘이 필요한데 19대 국회 종료일 이틀을 남기고 재의 요구가 들어온 것이다. 박 대통령은 해외순방 중인데도 국무회의에서 의결한 재의 요구를 전자결재까지 했다. 이는 박 대통령이 국회로 하여금 헌법을 지키기 위해 국회법을 위반하라고 요구한 것과 같다. 결국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시간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을 만들어 놓고 국회에 재의를 요청한 셈인데 헌법과 국회법이 연결된 법률적 문제를 제대로 검토하지 못한 황 총리와 제정부 법제처장의 책임이 가볍지 않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 등 야당이 “이제 박 대통령과 협치는 깨졌다”며 흥분하는 건 당분간 어쩔 수 없다고 본다. 거부권을 행사하더라도 박 대통령이 귀국하고 20대 국회 임기가 시작된 뒤 했더라면 이런 치명적 위헌 시비는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더 큰 눈으로 봐서 상시 청문회 문제로 20대 국회의 첫 출발이 파행과 경색으로 얼룩지는 사태를 두 야당이 앞장 서서 막아주기 바란다.

두 야당은 굳이 국회법 개정을 하지 않더라도 다수의 힘으로 언제든지 상시 청문회를 열 수 있다. 여소야대의 각 상임위에서 소관 현안을 중요 안건으로 명명할 권한은 사실상 야당의 손에 쥐어졌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20대 국회에선 청문회법 개정이 무의미했던 셈이다. 무의미한 사안을 놓고 대통령은 굳이 못하겠다고 버티고 야당은 굳이 하겠다고 용쓰는 건 허망한 국력 낭비 아닌가. 조삼모사(朝三暮四)엔 화내고 조사모삼엔 만족하는 우화 속 원숭이의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말아야 한다. 20대 국회는 정국을 안정시키고 이끌어가는 야당의 수권 능력이 유권자의 제1관심사가 된다. 더민주와 국민의당은 실리와 명분을 잘 가려 정국경색은 피하고 청문회 문화를 바꿔내는 정치력을 발휘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