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 포스트잇 물결…여성단체 “성차별, 여성혐오가 문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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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지하철 강남역 10번 출구 유리벽 앞에 19일 시민들이 가져다 놓은 곰인형과 꽃이 놓여있다(왼쪽 사진). [사진 신인섭 기자], [프리랜서 공정식]

“미안합니다. 이런 지옥 같은 세상에서 다시 한번 남자라서 살아남았습니다.”

“미안합니다, 남자라서 살아남아”
추모 글, 국화꽃, 화환 등 밀물
전문가 “사회적 안전망 만들어야”
공용화장실 안전 개선 목소리도
경찰 “피의자 정신분열 4번 입원”
여성혐오 범죄 결론엔 신중 입장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 유리벽을 가득 메운 메모지 중 한 장에 적힌 글이다. 지난 17일 강남역 인근 건물 공용화장실에서 벌어진 20대 여성 살인 사건이 피해자 추모 움직임을 넘어 여성 혐오에 반대하는 시민운동으로 번지고 있다. 사람들은 “여성이 안전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사건을 수사 중인 서울 서초경찰서는 일단 범인의 정신분열증이 심각한 것으로 확인된 만큼 여성 혐오 범죄로 규정하는 것은 아직 이르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분노는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추모 운동의 중심은 강남역 10번 출구다. 19일 이른 아침부터 추모 발길이 이어져 오후엔 한 번에 100명 넘는 시민들이 모이기도 했다. 오후 8시쯤부터는 500명 이상의 시민이 자발적으로 모여 촛불문화제를 열고 자유발언을 하기도 했다. 출구 유리벽은 시민들이 붙인 메모지 수천 장으로 가득했다. 유리벽 아래엔 국화꽃 등 꽃다발 수십 개가 쌓였고, 출구 주위로 빈소에 보내는 근조 화환도 놓여 있었다.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보낸 것들이다.

정치인들도 현장을 찾아 추모 움직임에 불을 지폈다. 지난 18일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현장을 찾았고 19일 오전에는 조은희 서초구청장, 오후엔 박원순 서울시장이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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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날 대구 지하철 중앙로역 2번 출구에 희생자 추도 쪽지가 붙어 있다. [사진 신인섭 기자], [프리랜서 공정식]

여성단체도 본격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있다. 한국여성의전화 송란희 국장은 “이번 사건은 우리 사회의 성불평등과 여성 혐오가 만들어낸 어쩌면 ‘일상’이라고 할 만한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며 “공식성명을 낼 계획”이라고 말했다. 한국여성단체연합 역시 입장문을 내고 “사건 희생자를 추모하며 여성에 대한 폭력, 살해와 혐오에 맞서 끝까지 싸우겠다”고 밝혔다.

신경아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는 “한국은 여성과 남성 간 불신의 골이 깊어 여성 혐오가 쉽게 나타난다”며 “여성 안전을 보장하는 사회적 안전망을 만들지 않으면 이런 현상이 계속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해외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2014년 5월 23일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엘리엇 로저(당시 22세)라는 대학생이 총기를 난사해 본인 포함 7명이 사망했다. 범인은 범행 전 여성에 대한 혐오를 표현한 살인 예고 동영상을 찍었고, 이후 온라인에서 여성 혐오나 차별에 대한 반대 운동이 일었다. 사람들은 ‘모든 여성이 차별을 겪는다’는 뜻에서 ‘YesAllWomen’이란 태그를 달고 여성 혐오 사례를 공유하거나 해결책을 토론했다. 이번 움직임이 한국판 ‘YesAllWomen’ 현상으로 번질 수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묻지마 범죄’로 알려진 살인 사건이 여성 혐오에 반대하는 시민운동으로 이어진 건 범인 김모(34)씨의 진술 때문이다. 김씨는 “여자들에게 무시를 많이 당했는데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범행을 저질렀다”고 경찰에 진술했다. 이후 “이는 분명한 여성 혐오 범죄이기 때문에 묻지마 범죄로 불러선 안 된다. 여성 혐오 범죄를 막기 위해 적극 나서야 한다”는 의견이 쏟아졌다. 또한 남녀 공용화장실에 대한 불안감을 호소하는 사람도 늘었다. 여성들은 “몰카 범죄도 모자라 살인까지 일어난 공용화장실에 대해 개선책을 내놓아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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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범행 동기 계속 수사”=경찰은 여성 혐오 범죄로 결론 내리기는 아직 이르다고 설명했다. 김씨가 해당 진술을 했고 여성이 들어오길 기다렸다가 살해한 건 맞지만, 정신분열로 4차례나 입원했던 김씨의 진술을 그대로 범행 동기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경찰 관계자는 “김씨는 지난 1월 마지막으로 퇴원할 때도 약을 제대로 복용하지 않으면 재발할 수 있다고 의사가 경고했을 만큼 정신분열이 심각했다”며 “프로파일러도 1차 심리면담 후 ‘김씨가 여성으로부터 피해를 당한 구체적 사례 없이 피해망상으로 인해 평소 피해를 받는다고 생각한 것 같다’는 의견을 냈다”고 말했다. 경찰은 프로파일러를 통해 범행 동기를 수사하고 있다.

한편 법원은 “범죄가 중대하고 도망하거나 증거를 인멸할 염려가 있다”며 이날 김씨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글=윤정민·서준석 기자 yunjm@joongang.co.kr
사진=신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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