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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그로부터 20년|국교정상화가 무엇을 가져왔나.<6>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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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지난 21일 하오7시30분.
서울 문예회관 대극장은 일본전통인형극 『분라꾸』(문악)공연으로 대성황을 이루었다.『분라꾸』는 『가부끼』와 함께 가장 일본적인 무대예술의 하나다. 일본 무대예술의 한국진출을 조심스럽게 타진해오던 일본은 이번에 『분라꾸』를 서울무대에 올린 것이다. 막이 오르고 두 인형끼리 칼싸움이 벌어졌다. 사신 차림의 인형이 칼에 맞고 쓰러지자 유배죄인 차림의 인형이 잽싸게 올라타고 목을 쳤다. 정말 인형목이 뎅강 떨어져 무대에 나뒹군다. 잠시 술렁이는 객석. 그러나 곧 잠잠해졌다.
공연이 끝나자 마치 벚꽃이 만개했다가 비감스럽게 떨어져 내리는 듯한 극적인 일본정서에 취한 듯 오랫동안 박수갈채가 계속됐다.
이날 객석의 대부분을 메운 나이 지긋한 관객들은 아주 오래간만이라는 듯 낯익어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60명중 35명 애독자>
바로 앞자리에선 일본 TV취재요원인 듯한 50대 신사가 약간 수줍어하는 20대 여성관객에게 우리말로 소감을 묻고 있었다.『어떠세요?』
잠시 머뭇거리자 그는 더 몸을 기울이며 계속 물었다.
『저항감이 안 들어요? 일본 것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예술작품이라는 쪽으로 보이지 않아요? 저항감 안 들죠? 그렇죠?』
여성관객이 당황하며 『예…그런 것 같아요』라며 얼버무렸다.
한일양국이 국교를 다시 튼지 20년. 지금 우리는 서울 한복판에서도 가장 일본적인 무대예술이라는 『분라꾸』를 구경할 수 있게됐다.
서울K여고 2학년 담임인 김모교사(35)는 며칠전 자기반 학생60명 중 35명이 일본잡지 애독자라는 사실을 알아내고 놀랐다. 그 중 25명은 매월 계속 본다고 했다. 직접 사서보는 학생은 6명이었고 나머지는 언니나 친구한테 빌어본다고 했다. 『논노』23명, 『스크린』10명, 『인티리어』2명으로 주로 패션류. 호기심과 흥미에 끌려 보는 학생들이 많았으나 옷입는데 참고한다는 학생들도 있었다.
이제 일본문화는 우리생활 깊숙이 파고들고 있다. 일부 제약이 있다고는 하나 마음만 먹으면 손쉽게 일본문화의 「맛」을 접할 수 있다. 그것이 공공연히 접근해오느냐, 아니면 지하로 스며들어오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서울의 신촌·명동·종로2가 등 「젊은이들의 거리」나 대학가 다방·경양식집. 디스코클럽 등에선 이제 일본대중가요가 별다른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일본노래 좀 틀어줘요』라고 요구하기만 하면 어김없이 일본가요가 흘러나온다.
가히 일본적이라 할 가라오께는 일본에서조차 소음공해로 말썽을 빚고 있으나 서울의 뒷골목에선 아직도 판을 치고있다.
한국음반협회 윤신영사무국장은 일본가요 불법복사테이프가 전국에서 한달 평균 10만개이상 유통되고 있다고 추정했다.
젊음을 좀먹는 일본소설붐도 문제다. 불황 속에서도 베스트셀러를 구가하는 이들은 선정과 호기심만 자극할 뿐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다. 『여자가 바다를 느낄 때』『늦여름의 연인들』『꽃뱀의 외출』『유혹의 나날』 등 3류 통속소설과 일본전국시대를 그린 『대망』, 태평양전쟁 이야기 『2차대전』, 전통무사도를 그린 『미야모또 무사시』『대인』 등 무협소설에 이어 『오싱』『기업열전』『도꾸가와 이에야스』 등이 쏟아져 나와 서점의 한 코너를 장식하고 있다.

<잡지대 3백31만불>
패션잡지를 비롯한 일본잡지 홍수도 일고 있다. 수년 전까지만 해도 『논노』『위드』 등 성인여성용패션잡지가 고작이었으나 80년대 들면서 『앙앙』을 비롯, 10대 패션잡지인 『세븐틴』, 남성패션지인 『맨스 월드』 등 종류가 다양해지고 영화잡지 『스크린』『로드쇼』 『근대영화』 등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지난 84년 일본에 지불한 잡지대금은 총3백31만달러로 이는 83년의 2배 가까운 액수다.
일본제 어린이만화들도 판치고 있다. 염치없이 베낀 것은 물론 눈가림으로 적당히 각색한 것에서도 일본냄새가 풀풀난다. 특히 공영방송은 가장 감수성이 예민한 어린이들에게 가장 침투력이 강한 만화영화를 통해 외국의 사고방식과 생활감정을 주입시키는 무분별한 행위를 일삼고있다.
TV의 연속극·기획물·선전광고에도 일본 것을 본따온 것들이 많다고 한다.
대중문화 중 현재 영화·가요·TV물이 금지되고 있으나 가요가 불법유통되고 있듯이 영화나 TV물 역시 비디오테이프의 형태로 불법복사, 지하유통되고 있다. 무릇 만물이 그렇듯 지하로 잠입해오는 일본대중문화의 독성은 한층 그 농도를 더하고 있다.
미술이나 공연예술분야는 근년들어 교류가 활발해졌으며 특히 한일수교 20주년을 맞는 올해 더욱 활기를 띠고 있으나 아직 이렇다할 실적을 얘기할 단계는 아니다.
이렇듯 우리 사회는 해방 후 청산되지 못한 일제잔재에 더하여 새로이 스며드는 일본문화가 중첩, 각 분야가 힘겨워하고 있다. 한국에 온 일본사람이 마치 또다른 일본에 온 듯한 착각을 일으킬 만큼 거리의 일본바람은 드세다. 한일양국은 향후 문학교류기금도 조성하고 교류의 폭도 넓혀갈 전망이다.
이제 일본문화를 대하는 우리의 문화역량은 시험대에 올랐다.
논자 중엔 일본과의 문화교류에서 자신감을 피력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일본과의 교류를 강화한다고해서 일본에 동화될 쓸개빠진 민족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경계론이 우세하다.
경계론자들은 우선 우리 집안단속이 제대로 돼있지 않다고 본다. 민족주체성 확립에 의문을 표시하고 있다. 일제잔재가 청산되지 않은 점을 가장 큰 취약점으로 지적하고 있다. 지하통로로 들어와서도 이토록 극성을 떠는 일본대중문화의 실상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자발적 수용의 소산인 것이다.

<아직도 경계론 우세>
유인호교수(중앙대)는 『지금이라도 주체성을 확립, 우리 내부에서 청산할 것을 청산한 후 다음단계로 나가야만 상호호혜가 되지 그렇지 않으면 종속으로 갈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음은 일본을 똑바로 알자는 것이다. 일본은 기본적으로 한반도 분단고정화 정책을 추진하는 세력이라고 주장한다.
일본은 지난 1백년동안 우리의 통일민족국가 형성을 집요하게 방해해 왔으며 그에 대한 반성을 한적이 없다는 것이다. 논자 중엔 80년대 한일문화교류촉진이 미국의 한일간 군사협력관계의 공식화를 위한 선행작업이란 주장도 펴고 있다. 일본연구가 긴요함을 함께 지적하고있다.
끝으로 일본이 수출할 수 있는 문화란 크게 보아 썩은 대중문화뿐이라는 것이다.
신용하교수(서울대)는 『일본이 서양자본주의 문명을 수입, 일본자본주의를 발전시키면서 배설해낸 악취나는 찌꺼기인 일본대중문화를 「문화교류」란 아름다운 단어로 포장, 우리에게 수입을 강요하고있다』면서 『그 퇴폐성은 세계에서도 악명높은 것』이라고 주장했다.<이근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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