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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계탕에는 닭 한마리가 있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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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9호 34면

치킨 chicken


생활대백과 사전 닭. 달걀과 고기를 얻기 위해 기르는 가축. 머리에 붉은 볏이 있고 날개는 퇴화하여 잘 날지 못하며 다리는 튼튼하다. 연간 100~220개의 알을 낳는다. 현재 사람들이 기르고 있는 닭은 3000∼4000년 전에 미얀마·말레이시아·인도 등지에서 들닭(野鷄)을 길들여 가축화한 것으로 추측한다.


그 여자의 사전 통닭 삼계탕 백숙 양념반 프라이드반 켄터키 프라이드 탄두리 버팔로 어떤 이름으로 변신하더라도 ‘치느님’‘언제나 진리’의 지위를 잃지 않으며 맥주와 결합하면 올림픽 월드컵 총선 대선 등 긴긴밤을 함께해 주는 최고의 파티 음식이며 현재 세계인류 최고의 단백질 공급원. 그것의 다리 부위는 인류 최고의 눈치 공급원. 지금 한국 사회에서는 그것을 ‘튀기는 사람’‘배달하는 사람’‘먹는 사람’으로 신분을 가르는 기준이 된다고도 사람들이 말하는 것. 어쩌면 너무 많은 사람이 이것을 튀기는 사람이 되어 ‘치킨 공화국’이 될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는 것. 그것의 대가리가 언급될 때는 멍청함을 상징하는 것. 하지만 그 여자는 ‘치킨’이 닭고기 이전에 닭이라는 새였고 생명체였음을 상기해야 하며 우리가 좀 더 그것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치킨을 말할 때 그 여자가 말하고 싶은 어린 시절이 있다. ‘치킨’이 아직 ‘닭고기’로 불리던 그 시절, 여자의 집에선 가끔씩 아버지가 사오는 영양 통닭이나 어머니가 끓이는 닭백숙을 먹곤 했다. 그런데 3남1녀였던 그 여자의 경상도 집에선 남아 선호사상이 지존의 이념이었다. 아들 셋에게 닭다리 두 개와 날개 등이 나눠지면 여자에게 돌아오는 건 목뼈와 등뼈 같은 것들뿐이었다. 여자는 닭이 미웠다. 집에 와서 닭을 끓이는 냄새만 나도 괜히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마도 여자가 비뚤어진 성격을 가지게 됐다면 그것은 순전히 닭 때문일 것이다.


그러다 여자는 취직을 하게 됐다. 동료들이 “삼계탕을 먹으러 가자”고 했을 때 그 여자는 어린 시절 그 냄새의 기억을 떠올리며 내키지 않아 했다. 그러나 삼계탕 집에서 여자는 즐거운 충격을 느꼈다. 닭 한 마리가 온전히 내 그릇 안에 들어있어 다리 날개 모든 부위를 온전히 내 뜻대로 처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삼계탕 속 닭 한 마리는 이제 진정 부모님으로부터 독립과 자유를 얻은 여자의 성장을 상징해 주었다. 여자는 그때부터 닭고기를 가장 사랑하게 되었다. 여자는 자주 ‘다리만’ 메뉴를 배달해 먹지만 아주 가끔 그것도 추억이라고 어린 시절이 그리울 땐 한 마리를 시킨다. “목뼈도 꼭 가져다 주세요”라며.


누구나 치킨에 얽힌 기쁘고 슬픈 추억이 있다. 대부분은 웃음을 떠올리는 기억이 더 많을 것이다. 치킨은 언제 어디서든 소박한 자리를 풍성한 파티의 자리로 변신시켜준다. 김연아?박태환?박지성이 영웅으로 탄생할 때도 그 기쁜 순간을 우리는 치맥과 함께했다. 전화만 하면 완성된 음식을 맛볼 수 있는 간편함과 기름에 튀긴 고소함 그러면서도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은 쇠고기나 돼지고기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러나 요즘은 ‘치킨 계급론’‘치킨 공화국’론까지 등장하며 어쩐지 치킨이 점점 슬픈 상징이 되어가는 것만 같다. 애초에 ‘프라이드 치킨’이라는 음식이 미국 남부의 흑인 노예들이 오븐이 없어 튀겨먹기 시작했다는 눈물어린 역사적 기원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정작 이제 ‘치킨’이라는 먹는 것으로만 불릴 뿐 하나의 생명체 ‘닭’으로서는 인간의 머릿속에 기억되지 않는 닭의 슬픔에 비하랴. 치킨이 안겨준 즐거움에 비하면 우리는 닭을 너무 존중하지 않았다. 지금은 상상하기 힘들지만 닭은 한때는 동남아시아의 밀림을 날아다니던 야생동물이었으며 아시아에서 귀한 생물이 왔다며 유럽의 왕에게 바쳐지고 전문 사육사가 보살핀 왕실의 동물이었다. 뿐만 아니라 수탉이 우는 매일 아침 어둠이 아무리 깊어도 새벽의 여명이 온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우리는 새날의 희망을 품어왔다.


그러니 우리는 치킨을 먹기만 하면서 닭에게 비하적인 은유만 덧씌울 게 아니라 “언젠가 먼 훗날에 저 넓고 거친 밀림으로 돌아갈 거라고~”같은 잃어버린 닭의 꿈에 바치는 노래라도 불러주어야 할 것이다. 자신의 목청과 살에서부터 달걀까지 고스란히 모든 걸 내어주며 그 오랜 역사 동안 인간에게 안겨준 것들에 좀더 감사하는 마음으로 감정이입한다면 치킨의 더 큰 슬픔도 읽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닭이 꼬챙이에 몸을 깊숙이 찔린 채 뱅뱅 돌아가고 있다. 등판과 다리와 날개에 뜨거운 열기가 어지럽게 몰아칠 때 닭은 그래도 안심한다. 그래도 나는 이 넓은 세상을 보고 떠나는 거잖아. 나의 알들은. 껍질을 깨어보지도 못한 그 아이들은….’


이윤정 ?칼럼니스트. 사소하고 소심한 잡념에 시달리며 중년의 나이에도 영원히 철들지 않을 것 같아 고민인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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