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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옷을 살짝 비틀어서, 색다르게 입으면 멋지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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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치토세 아베

치토세 아베(51)는 일본 나고야에서 패션학교를 졸업하고 도쿄에 있는 대형 패션업체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스물네 살 되던 해 유명 디자이너 브랜드인 ‘꼼 데 가르송’으로 이직했다. 패턴 디자이너로 8년간 일하면서 결혼하고 아이도 갖게 됐다.
출산과 함께 퇴사한 게 서른 두 살 때였다. 1980~90년대 일본(그리고 한국)에서 일하는 여성들이 흔히 경험한 길이다. 하지만 아베는 ‘경단녀(경력 단절 여성)’에 머물지 않았다. 털실 열 뭉치를 사다가 손으로 니트 조끼를 짰다. 완성한 니트웨어 5벌을 편집매장에 맡겼는데 모두 팔렸다.
지금 세계 패션계가 주목하는 럭셔리 브랜드 ‘사카이’의 시작이었다. 지난달 서울 청담동에 사카이 플래그십 스토어를 열기 위해 방한한 아베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만났다. 도쿄·베이징·홍콩에 이은 세계 네 번째 플래그십 스토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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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이’의 치토세 아베 디자이너는 이질적인 질감의 섬유를 섞어 조화로운 스타일을 만들어낸다. 프랑스산 앤티크 가구를 현대적으로 변형시킨 매장 인테리어도 같은 맥락이다.

아베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는 검은색 반소매 티셔츠와 스키니진을 입고 나타났다. 찢어진 청바지 사이로 양쪽 무릎이 훤히 드러났다. 10㎝는 족히 넘어 보이는 플랫폼 부츠로 스타일을 완성했다. 큰 눈과 짙고 긴 갈색 머리까지 더하니 만화 여주인공 느낌이 났다. 18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사카이를 글로벌 럭셔리 브랜드로 키워낸 ‘포스’와는 거리가 있는 첫인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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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가지 소재를 섞은 레이스 디테일의 드레스. 언뜻 보면 서너 벌의 옷 같다.

1999년 론칭한 사카이는 트렌드 리더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고 있다. 파리의 콜레트, 런던의 도버 스트리트 마켓, 뉴욕의 바니스 백화점 등 세계 유수의 매장 200여 곳에서 판매 중이다. 패션계 거장인 칼 라거펠트 샤넬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는 사카이를 “요즘 가장 흥미로운 브랜드”라고 평했다. 사카이 패션쇼가 끝나면 아베 디자이너에게 꽃과 카드를 보내기도 한다. 할리우드 배우 기네스 팰트로우도 사카이를 즐겨 입는다.

사카이는 이제 컬트한 팬층에서 벗어나 대중이 알아보기 시작했다. 애플·나이키·버켄스탁 등의 러브콜을 받고 진행한 콜래버레이션 작업도 한몫했다. 브랜드명 사카이(Sacai)는 결혼 전 그의 성(Sakai)을 조금 바꾼 것이다.

사카이를 설립한 동기는.
“‘꼼 데 가르송’에서 일하다가 출산을 계기로 퇴직했다. 패션 최전선에서 너무 바쁘게 지내다가 출산과 육아 때문에 일을 못하게 되자 심적으로 힘들었다. 다시 일을 하고 싶었다. 특이하고 예쁜 니트웨어를 만들면 재밌겠다고 생각했다. 5벌을 만들어 ‘빔스’라는 편집매장에 가져갔더니 두고 가란다. 며칠 뒤 연락이 왔다. 다 팔렸는데 추가로 더 만들어 보낼 생각 있느냐고. 사카이의 시작이었다.”
막상 창업하니 어떤 점이 어렵던가.
“처음부터 사업을 하겠다고 마음먹고 브랜드를 시작한 게 아니다 보니 특별한 어려움은 없었다. ‘이렇게 해보면 예쁘겠다’고 생각한 것들을 하나둘씩 만들어나가면서 사업으로 발전했다.”


섞고 변주해 새로움 찾아내는 ‘소재의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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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감의 개념을 재정의한 레더 바이커 재킷. 안감으로 사용한 티베트산 양털이 밖으로 뻗쳐 나왔다.

사카이는 다양한 소재를 결합하고 변주해 새롭고 혁신적인 디자인을 만드는 걸로 이름을 알렸다. 니트 같이 질감이 느껴지는 패브릭과 실크·쉬폰 같은 매우 얇은 직물을 함께 사용해 패턴을 재해석한다. 질감과 옷의 비율이 바뀌면서 예상치못한 형태와 실루엣이 탄생한다. 주로 가죽 바이커 재킷, 보머 재킷(항공 점퍼), 코트 같은 클래식 남성 아이템에 니트·퍼(fur) 등 이질적인 재료들을 결합해 여성복을 만들었다.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소재를 섞었는데 절묘하게 어울리는 게 그의 디자인이 가진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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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문을 연 서울 청담동 ‘사카이’ 플래그십 스토어. 앤티크 가구를 배치하면서도 모던하게 꾸몄다.

평범한 것을 살짝 비틀어서 기대했던 것과 다른 ‘배신감’을 느끼게 하는 점도 사카이의 트레이드 마크. 이를테면 앞에서 보면 원피스인데 뒷모습은 스웨트셔츠에 레이스 치마를 입은 듯한 모습을 연출한다. 모두 연결된 하나의 원피스인지, 두 벌을 입은 것인지 세 벌인지도 아리송하다. 눈으로 착각을 불러일으켜 즐거움을 준다.

이색적인 소재의 결합은 어떻게 시작됐나.
“소재를 섞거나 대조되는 질감을 사용하는 하이브리드 작업을 하게 된 계기는 옷을 만든 지 2년쯤 됐을 때였다. 옷장을 열어보니 카디건과 진, 폴로 셔츠 등 평범한 옷이 많았다. 흔한 기본 아이템을 예상치 못한 디자인으로 풀어내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익숙한 것으로 익숙하지 않은 걸 만들 때 반전의 묘미가 있다.“
소재를 결합하는 원칙이 있나.
“처음엔 표면적인 하이브리드에 치중했다. 소재가 다르거나, 물리적으로 다름을 알 수 있는 것들을 사용했다. 이런 작업은 이젠 다른 브랜드에서도 많이 한다. 우리는 뿌리 깊은 곳에 있는 이면성까지 다루고자 한다. 여성적이면서도 남성적이고, 스포티하면서 클래식한 식이다. 사람에게도 다른 성질이 공존 하듯이,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트렌드를 어떻게 읽어내나.
“몸으로 체감하는 게 디자인으로 나온다. 섬유 전시회나 여행에서 영감을 얻진 않는다. 도쿄에 사는 18세 딸을 둔 워킹맘으로서의 평범한 일상과 백악관 만찬에 초대받는 특별한 경험이 모두 어우러져 아이디어가 나오는 게 아닐까.”

사카이 옷은 화려하고 독특하면서도 웨어러블하다는 평을 듣는다. 비즈니스 미팅, 학부모 회의, 저녁 리셉션 등 옷 한 벌로 여러 자리에 어울리는 디자인을 추구한다. 대도시에 사는 워킹맘으로서의 경험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오래 살아남기 위해 천천히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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셔츠, 재킷, 반바지의 체크 무늬 색상과 크기가 제각각이지만 조화롭다.(사진 왼쪽) 분해와 재조립을 테마로 한 드레스는 빅토리안 시대를 연상케 하는 골드 레이스를 더했다.

그는 아름다운 옷을 만들어내는 예술가이자 성공한 사업가이기도 하다. 사카이 창업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외에 최고경영자(CEO)도 맡고 있다. 회사 지분 100%를 소유한 오너이기도 하다. 창작의 자유를 누리기 위해 외부 투자를 받지 않고 있다.

플래그십 스토어가 모두 아시아에 있는데.
“아시아에 플래그십 스토어를 먼저 열게 된 것은 이곳에서 좋은 비즈니스 파트너를 만났기 때문이다. 순리대로 일하는 걸 좋아한다. 외부 투자 없이 유기적으로 성장하겠다는 분명한 철학이 있다.”
지금은 속도의 시대 아닌가.
“스스로를 이해하는 게 먼저다. 마케팅과 비즈니스 계획이 너무 앞서면 브랜드의 생존이 위협받을 수 있다. 몇 년 안돼 사라지는 브랜드가 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가고 있다. 매출이 오르는 것도 중요하지만 크리에이티브를 기반으로 하면서 비즈니스를 이어갈 수 있는 균형이 더 중요하다.”
2011년부터 파리에서 패션쇼를 열고 있는데.
“브랜드를 글로벌하게 알리기 위해서는 파리컬렉션 무대에 서야하는 게 맞다. 하지만 남들이 하기 때문에 무조건 따라하고 싶지는 않았다. 꼭 파리에서 패션쇼를 해야 하는 것인지 납득되지 않아 시간을 오래 끌었다.”
이유를 찾았나.
“모델들이 옷을 입은 채로 보여주면 소재나 볼륨감이 더욱 선명하게 보인다. 쇼룸(디자이너 의상을 바이어에게 선보이고 거래를 주선하는 공간)에서는 한계가 있는 부분이다. 런웨이에서 내 옷을 보여줄 이유가 충분했다.”
짧은 시간에 글로벌 브랜드가 된 비결은.
“일하는 방식이 유연하다. 일본에서는 웬만한 업무는 자사 직원이 내부에서 처리한다. 사카이는 크리에이티브, 홍보, 영업 총괄 등 중요한 업무까지 외부 전문가에게 아웃소싱하고 있다. 소속은 다르지만 팀으로 일한 지 오래됐다. 사카이가 배라면 18년 동안 좋은 선원들이 타줘서 안정적으로 좋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
사카이처럼 성공하려면.
“돈 없어서 브랜드를 못 한다는 둥 뭐가 부족해서 못 한다는 말은 변명일 수 있다. 내가 털실 열 뭉치로 시작했기 때문이다. ‘사카이가 사카이답고, 사카이에서만 볼 수 있는 표현방법·소재·실루엣이 있어야 한다.’ 잘 될 거라는 믿음을 갖고 진심으로 일을 좋아해야 한다. 나는 일이 재미있어서 하루도 쉬지 않는다.”
옷을 멋지게 입으려면.
“가장 중요한 것은 옷 입는 걸 즐겨야 한다. 기대를 비트는 배신감, 그래도 안정적으로 보이는 균형감도 중요하다. 디자이너로서의 바램은 내 옷을 입고 온종일 기분이 좋았다는 체험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부적 하나 지니고 있는 것처럼.”

글=박현영 기자 hypark@joongang.co.kr
사진=사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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